[전남인터넷신문]우후죽순, 죽순의 계절이 왔다. 봄비가 한 차례 대숲을 적시고 지나가면, 땅은 조용히 숨을 고르다 어느 순간 힘찬 생명의 소리를 밀어 올린다. 죽순은 그렇게 온다. 꽃처럼 피지 않고, 열매처럼 매달리지도 않는다. 어둠 속에서 오래 준비한 힘을 한순간 땅 위로 밀어 올리며 온다. 그래서 죽순은 식재료이기 이전에 자연이 건네는 한 문장 같다. “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솟아오르라.”
나는 음식을 연구하며 늘 생각한다. 좋은 음식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가르친다. 발효가 시간을 견디는 지혜라면, 죽순은 때를 놓치지 않는 결단의 지혜다. 흑초가 곡식과 물과 미생물이 긴 시간을 통과하며 깊은 맛을 얻는 과정이라면, 죽순은 땅속에서 침묵으로 힘을 모으다 짧은 순간 세상 밖으로 나오는 생명의 직진이다.
내 고향은 강진군 성전면이다. 바다와 아주 가깝지는 않았지만, 외가가 바닷가와 이어져 있어 어린 시절 내 밥상에는 바다 냄새가 먼저 배어 있었다. 낙지, 고동, 우렁 같은 것들이 내게는 추억의 식재료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죽순을 모르고 자랐다. 죽순은 내 어린 시절의 음식이 아니라, 담양에 와서 비로소 만난 음식이었다.
25년 전 담양군 창평에 둥지를 틀면서, 나는 죽순을 새롭게 배웠다. 처음부터 죽순이 내게 특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던 것은 어린 시절 추억의 향이 묻어 있는 우렁이었다. 담양에 와서 죽순과 우렁이 만난 초무침을 처음 먹었을 때, 나는 낯선 식재료 속에서 익숙한 고향을 만난 듯했다. 아삭한 죽순의 결, 쫄깃한 우렁의 식감, 새콤한 양념의 긴장감이 한 접시에 모인 죽순우렁초무침은 어린 시절과 현재의 시간이 겹치는 것 같았다.
발효요리 연구가의 눈으로 보면 초무침은 참으로 지혜로운 음식이다. 식초의 산미는 재료의 잡내를 잡아주고, 입맛을 깨우며, 무거운 맛을 가볍게 들어 올린다. 흑초가 가진 깊고 둥근 산미를 살짝 더하면 죽순의 청량함과 우렁의 감칠맛은 더욱 또렷해진다. 산미는 음식을 시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료가 가진 본래의 목소리를 깨우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담양을 말할 때 대나무를 떠올리고, 담양의 대표 음식으로 죽순을 말한다. 그런데 담양은 대쪽 같은 선비정신의 고장이고, 곧음과 절개의 언어가 생활 속에 스며 있는 땅이다. 그래서 죽순은 특별하다. 죽순은 대나무가 되기 전의 어린 생명이다. 아직 마디가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곧음을 품고 있다. 아직 숲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숲의 운명을 품고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죽순은 가능태와 현실태 사이에 놓인 존재다.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나의 씨앗 안에는 이미 나무가 되려는 정신이 들어 있다. 도토리 안에 참나무의 가능성이 들어 있듯, 죽순 안에는 대나무의 직립과 절개가 들어 있다.
죽순을 캐러 가는 날은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죽순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늘의 죽순은 내일이면 너무 자라버린다. 음식에도 때가 있고, 삶에도 때가 있다. 죽순은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는 식재료다. 좋은 죽순은 땅과 가장 가까운 시간에 만난다. 이슬을 머금은 죽순을 캐고, 껍질째 쌀뜨물에 푹 삶아 독성을 제거한 뒤, 여린 속살을 찢어 기름소금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은 놀라울 만큼 맑다. 삶아낸 죽순의 여린 속살을 쭉쭉 찢어 소금기름에 찍어 먹으면 죽순이 왜 선비의 음식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있다. 죽순회는 화려한 양념을 걷어낸 자리에서 재료의 본질을 보여준다. 바로 그 맑은 맛이 담양 대숲의 속살이었다.
죽순은 반드시 익혀 먹어야 한다. 생죽순에는 독성을 가진 시안배당체 성분이 있어 충분히 삶아 제거해야 한다. 대개 껍질째 쌀뜨물에 삶아 아린 맛과 독성을 빼고, 맑은 물에 헹군 뒤 조리한다. 자연의 식재료는 늘 선물인 동시에 예법을 요구한다. 발효도 마찬가지다. 미생물의 힘을 빌리되 온도와 시간과 청결을 지켜야 하듯, 죽순 역시 자연이 정한 조리의 법도를 따라야 비로소 안전하고 귀한 음식이 된다.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속에서도 죽순은 귀한 식재료였다. 궁중과 양반가의 밥상에는 죽순채, 죽순나물, 죽순전, 죽순탕 같은 음식이 올랐다. 『규합총서』와 『음식디미방』 같은 옛 조리서가 보여주듯, 우리 조상들은 계절의 재료를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제철에 나는 것을 거두고, 삶고, 무치고, 끓여 한 계절의 기운을 밥상 위에 올렸다. 죽순은 그중에서도 봄과 초여름 사이, 땅의 기운이 가장 힘차게 솟는 시기의 상징이었다.
죽순은 열량은 낮고 식이섬유가 풍부해 장 건강과 식생활 관리에 도움이 되는 식재료로 알려져 있다. 칼륨은 나트륨 배출과 관련해 주목받고, 비타민 B군은 에너지 대사와 연결된다. 물론 음식 하나가 병을 고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식재료가 몸의 균형을 돕고, 계절의 리듬을 회복하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음식은 약이 되기 전에 먼저 삶의 질서가 된다.
죽순은 곧게 자란다. 구부러져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그 짧은 생의 순간부터 이미 대나무의 방향을 알고 있다. 오늘의 세상은 흔들림이 많다. 빠른 말, 거친 판단, 혼탁한 욕망이 우리를 자주 흔든다. 그럴 때 담양의 죽순 한 접시는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향해 곧게 자라고 있는가.”
담양에 오면 죽순요리를 꼭 맛보시라. 죽순우렁초무침도 좋고, 죽순된장국도 좋고, 죽순회도 좋다. 중요한 것은 죽순을 먹는 일이 단순한 미식 체험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숲이 키운 생명의 속살을 만나는 일이고, 선비의 고장 담양이 품은 곧음의 정신을 혀끝으로 배우는 일이다. 죽순의 계절이 왔다. 봄비가 지나간 대숲에서, 땅은 다시 우리에게 말한다. 삶은 때를 기다리는 인내이자, 때가 왔을 때 솟아오르는 용기라고. 그리고 좋은 음식은 언제나 그 삶의 이치를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가르쳐준다고.
참고문헌
곽경자. 2026. 지친 현대인을 살리는 바다의 산삼 낙지 한 접시.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5-26).
곽경자. 2026. 보리밥 열무김치 비빔밥, 발효음식 속에 담긴 흥 문화.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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