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jnnews.co.kr@hanmail.net
[전남인터넷신문]‘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에 또 하나의 깊은 울림이 스며들었다. 마을 산하 문빅토르미술관은 세계적인 고려인 미술거장 문빅토르 화백의 신작 〈머나먼 길 (Дорога дальняя),116.5×91cm, 캔버스 유화, 2025〉를 공개했다.이번 작품은 단순한 회화를 넘어선다. 한 민족이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자, 끝내 다 말해지지 못한 이주와 방랑의 기억을 응축한 ‘침묵의 기록’이다. 캔버스 위에는 나뒹구는 기차바퀴와 갓을 쓴 고려인, 허우적거리는 군상, 그리고 크렘린궁을 연상시키는 건물 형상이 뒤엉켜 있다.
이 장면들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비극에서 비롯된 역사의 파편들이다.차가운 철로 위를 달리던 화물열차, 낯선 땅에 내려진 뒤 이어진 생존의 시간,언어와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던 세월까지-그 모든 시간은 하나의 형상이 되어, 화면 위에서 서로 뒤엉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형상은 어디로 향하는가. 작품은 끝내 도착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관람객에게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이 혼돈의 삶은 끝난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작품 속 인물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익명으로 남겨진 존재들. 하지만 그 익명성 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것은 ‘절망의 계곡에서 허우적되는 그들의 이야기’다. 서로를 의지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견뎌야 했던 시간, 고독과 연대가 교차하던 디아스포라의 현실이 깊게 스며 있다.
그 혼돈의 길 위에는 절망만 존재하지 않는다. 끝내 살아남고자 했던 의지와 꺼지지 않는 희망의 빛이 함께 놓여 있다.
문빅토르 화백 특유의 절제된 색채는 말없는 화면 속에서도 강하게 맥박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 길을 한 걸음씩 따라 걷게 만든다. 이 작품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머나먼 길’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광주 고려인마을은 그 길의 종착지가 아니라 또 다른 출발선이다. 조상의 땅으로 돌아온 고려인 동포들은 지금도 새로운 삶을 일구며 또 하나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머나먼 길〉은 과거의 기록이자 현재의 이야기이며, 미래로 이어질 서사의 한 장면으로 남는다.
이 작품은 비극의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긴 시간을 견디며 끝내 삶을 이어가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존엄의 기록’이다. 머나먼 길 위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끝내 지켜낸 것은 삶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삶은 지금, 광주 고려인마을이라는 공간 속에서 다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문빅토르미술관 관계자는“〈머나먼 길〉은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의 길로 잇는 작품”이라며 “이 그림을 통해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다시 마주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고려방송: 이믿음 (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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