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jnnews.co.kr@hanmail.net

1905년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그는 1910년 국권 피탈에 항거하는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하며 항일운동에 나섰다. 이어 러시아 신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의 서울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다 강제 추방을 당하는 등 탄압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연해주 신한촌 한민학교 교사로서 민족교육에 헌신하고, 『청구신보』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한인 사회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선언서를 러시아어로 번역·보급하며 국제사회에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힘썼다.
이후 대한국민의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상해로 파견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총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조직과 사상을 이끌었다. 또한 고려공산당 조직과 잡지 『공산』, 『신생활』 발간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민족 해방을 위한 길을 모색했다.
그의 투쟁은 총칼을 넘어섰다. 교육과 언론, 사상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준비한 실천적 지식인이자 혁명가였다. 연해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는 고려사범대학 설립과 한인 학교 확산에 힘쓰며,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진 그는, 1938년 ‘반소 활동’ 혐의로 체포돼 1938년 10월 7일 알마타주 내무인민위원회 트로이카의 결정에 따라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았다. 선고는 다음 날인 10월 8일 집행되었다. 그의 묘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1958년 투르크스탄군관구 군사법정에 의해 복권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최근 들어 그의 삶과 업적은 고려인마을을 통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과 고려신문이 함께 추진하는 이번 사업은 단순한 인물 발굴을 넘어, 흩어진 민족의 기억을 다시 잇는 역사 복원의 과정이다. 현재까지도 후손의 정확한 행방은 확인되지 않아, 양 기관은 기록 발굴과 조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고려인마을 관계자는 “김만겸 선생은 교육과 언론, 사상을 통해 독립을 준비한 인물”이라며 “그의 삶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가 어떤 역사를 살아왔는지를 되묻는 일”이라고 말했다.
전쟁과 망명, 그리고 강제이주의 시간을 지나며 희미해졌던 한 이름. 잊혀진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한 사람의 삶이 다시 기억될 때, 민족의 역사는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고려방송: 이부형(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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