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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노을
  • 기사등록 2011-05-04 13: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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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새벽에 피어나는 여명의 노을은 사람에게 희망과 강렬함을 주어 하루의 시작을 짜릿하게 할 수 있도록 신선한 이미지와 삶의 활력을 아낌없이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의 상기된 볼처럼 홍조를 띠면서 하늘에 깔아놓은 구름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말로써는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형상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다가 급기야는 붉은 기운이 뭉쳐있다 깨어지는 듯이 뜨악한 햇볕과 함께 한낮의 이글거리는 포효로 변합니다.

정오에 숨 막히는 정도의 가픈 순간을 지내고 나면 머리를 찌르는 햇살들이 한고비 돌아 서산을 향하여 꺼져가는 동안에는 점차 빛과 열을 줄여가면서 겸허하게 이 세상의 퇴장을 준비 합니다.

여명의 순간에 동쪽 하늘에 깔아 놓았던 빛의 향연과는 달리 땅거미가 밀려오기 직전인 석양 무렵부터 하루 동안 달려온 우여곡절의 한 자락을 다른 각도에서 새로이 그리려는지 몰라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오케스트라를 우아하게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노을일지라도 아침에 펼쳐지는 노을과는 달리 저녁에 펼쳐지는 노을은 무언가 허전한 마음으로 약간의 슬픔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수세기에 걸친 중국의 문화가 화려하게 펼쳐졌던 당나라에는 고대의 시경에서부터 비롯된 시의 세계가 시선이라 불리는 이백과 시성이라 칭하는 두보에 의하여 한층 깊이를 더해가는 황금기를 맞이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두보는 이백이 태어난 해로부터 약 11년이 지난 선천 원년(712년)에 하남의 낙양에서 약 동방으로 50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공현에서 태어났으며, 이백의 출신 성분이 명백하지가 않았던 것과는 달리 두보는 진나라 때 유명한 학자이자 재상인 두예의 13대손이고, 할아버지 두심언은 유명한 시인이었으며, 아버지 두한은 두보가 20대 무렵 섬서 성의 봉천현령을 지낼 정도로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최씨 가문의 사람으로 두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곧 바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린 시절 계모와 배다른 동생들이 있었으므로 고모의 집에서 자라난 두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지가 못하여 작품에 묘사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비슷한 또래의 고종사촌과 함께 자라면서 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고모의 극진한 병간호로 두보는 기사회생 하였으나 고종사촌은 안타깝게 어린나이에 사망하였다 합니다.

성장한 두보가 나중에서야 하인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고모의 간호가 사촌보다 더 극진하여 생명을 부지하게 된 것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이 세상에 유일하게 혈육의 정을 느끼던 고모는 두보가 31세 때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24세 무렵 낙양에서 과거시험이 있었는데 단 27명만이 합격하고 나머지 응시생 수천명은 모두 낙방을 하고, 두보도 끝내 합격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두보가 관직을 향한 과거시험에 응시한 흔적이 없으며, 36세가 되던 해에 현종이 천하에 조서를 내려 우수한 능력을 갖춘 재야의 인물을 중용 하겠다 하여 당시 친분이 돈독하였던 ‘위제’의 추천까지 받아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가졌음에도 시험관인 이 임보는 단 한사람도 뽑지를 않는 매정함을 보여 결과적으로 두보의 인생도 꼬여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글 솜씨도 있다고 생각 하였고 더구나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의 후원도 받았지만 기회를 놓친 두보는 “최근 천자의 부르심 있어,/ 절호의 기회라고 용기를 내었네./ 그런데 하늘에 날개를 늘어뜨리고,/ 피로하여 약동하는 비늘도 없구나.”라는 좌절감에 젖은 시를 썼던 것입니다.

사나이의 깊은 뜻을 미처 펼쳐보지도 못하고 세월만 가는 것을 초조하게 여긴 두보는 이후 현종의 생질 농서공 이우를 비롯하여 수많은 권력가들에게 시를 아낌없이 바치며 스스로의 돌파구를 뚫으려 노력 하였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일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당나라에 귀순한 고 사계 장군의 아들로 서역 진출의 일등공신이자 안서도호를 지낸 고선지에게도 시를 바친 것으로 보입니다.

두보가 평생 동안 남긴 시가 약 1500여수 정도 되었다는데, 그중 대부분인 1,480여수의 작품은 장안으로 진출한 35세 이후에 지었다 합니다.

당시 지은 시의 내용들은 부양할 가족은 많지만 벼슬길이 열리지 않아 고통을 당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고 뼈가 저리도록 정돈된 이성이 번득여 명쾌하게 다듬어진 시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황색 고니는 쉬지 않고 날고/ 슬피 울며 어디로 가느냐./ 보라 해를 쫒는 기러기는/ 모두 도량의 계가 있건만.” 이라고 허전한 마음을 읊조리고, 광문관 박사 정 건과 술을 마시고는 “제공들 으스대며 벼슬에 오르건만,/ 광문 선생 홀로 쓸쓸 하네./ (중략) 두릉의 야인은 객이 더 비웃고/ 베옷은 짧고 좁아 귀밑머리 실 같네./ 매일 태창미 다섯 되 사고/ (중략) 사마상여는 뛰어난 재주에도 접시를 닦고,/ 양웅은 글을 배우자 몸을 던졌네./ 선생은 일찍이 귀거래사나 읊으시지./ (중략) 공자도 도척도 모두 티끌이 되었는데./ 내 생각 듣고 비통해 마시오./ 생전에 서로 만나 술이나 듭시다.”

철 늦은 노란 결명자 꽃을 보고 “찬바람은 소슬하게 철을 재촉하는데/ 때늦은 너는 혼자 버티지 못하리라./ 이집 서생은 헛되이 백발 되었고,/ 바람 따른 너의 향기에 눈물짓누나.”

현종 황제가 역대의 조상 앞에 제사를 모시는 행사를 찬양하여 “삼례대부”라는 시를 적어 조정의 투서함에 넣은
이후로 우여곡절 끝에 44세의 나이에 ‘우위솔부 병조참군’이라는 하급 관리에 처음으로 임명되어 뒤늦은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

박복한 시인께서 겨우 벼슬자리에 올랐는데 이란계의 아버지와 터키계의 어머니 사이에 혼혈아로 태어난 이민족 장수인 “안녹산”의 난이 일어납니다.

이 난리를 평정 하도록 명을 받은 고선지 장군은 뛰어난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 국가의 식량을 마음대로 후하게 나누어 주었다는 누명을 쓰고 그동안의 혁혁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나라 잃은 이민족의 장수라는 약점을 안고 처형이 됩니다.

가족들을 장안으로 데려 오려다 오히려 난리를 피하여 부주로 어렵사리 피신시키고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그나마 얻었던 벼슬도 사라져 버리고 장안이 반란군에 함락되자 어쩔 수 없이 억류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두보와 절친한 정 건과 왕유등도 강제로 반란군의 관직에 앉게 되었는데 훗날 반란이 진압된 후 처벌을 받게 됩니다.

두보는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몸이었는데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하여 촉으로 피신한 현종의 아들 숙종이 주둔하는 봉상에 가서 좌습유의 벼슬을 받게 됩니다.

당시 이백은 현종의 명을 받은 영왕 에게 부름을 받아 종군을 하였는데 훗날 숙종이 득세함에 따라 영욕이 갈리게 됩니다.

두보도 ‘방관’이라는 장군을 두둔하는 상소문을 숙종에게 올렸다가 궁지에 몰려 벼슬을 박탈당하고 부주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는데, 얼마나 생활이 곤궁하였는지 “해를 지나 집에 이르니,/ 아내와 자식은 누더기 꿰매 걸쳤네./ 통곡소리는 소나무와 맴돌고/ 샘물은 슬피 우는 구나/(중략) 아버지 보고도 등 돌려 칭얼대고,/ 때 투성이 버선조차 신지 않았네./ 평상 앞 두 어린 딸도/ 꿴 옷이 겨우 무릎을 가리는 구나.”고 “북정”이라는 시를 남깁니다.

“곡강 제2수”에서는 “한조각의 꽃잎이 날려도 봄맛을 털어버리고,/ 바람은 만 점을 흩날려 사람을 정히 수심케 하네./ 이제 눈앞에 스치는 꽃이 다 지려는 것을 보니./ 아픔뿐인 세상 마다 않고 술만 들이키네./ 강 위 소당에는 물총새가 집을 짓고,/ 오랜 무덤 주변에 새겨진 기린들./ 술 마시고 입신출세함도 생각하면,/ 이 몸의 속박에 지나지 않는 것이로다.”고 세속에 처연한 입장을 취합니다.

건원 2년 52세가 되는 노 시인은 전쟁의 참화로 황폐한 현실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적었는데 ‘신안리’ ‘동관리’ ‘석호리’라는 “삼리”와 ‘신혼별’ ‘수로별’ ‘무가별’등의 “삼별”이라는 여섯 수의 작품에서 사실적이고 독창적인 내용의 빼어난 작품을 완성하게 됩니다.

안녹산의 난을 겪으면서 전쟁의 참화가 얼마나 처절하게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지를 지켜본 시인은 평화로운 세상과 평범하면서도 조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생활이 무엇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꿈꾸는 시인은 벌레를 잡아먹는 닭과 이를 보다 못해 팔려고 하여 아내와 아들에 의하여 묶인 닭을 풀어주면서 생존하는 모든 존재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묶인 닭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도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벼를 베고 남은 농토에 아이들이 마음 놓고 이삭을 주워 가도록 하고, 벼를 훑어내는 농기구를 설치하면서도 개미집을 건드릴까 걱정을 하고, 이웃에 사는 ‘오랑’이라는 사람에게 울타리를 고치지 않고 계속하여 대추를 따가도록 놓아두는 것입니다.

53세의 노령에 성도로 가서 엄무라는 사람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다가 홀연히 54세에 관직을 사임하고 10여명의 가족을 이끌고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무슨 이유로 겨우 붙잡은 관직을 버리고 많은 가족과 함께 떠나야만 했는지 정말 후세의 사람들을 참으로 안타깝게 합니다.

생활이 곤궁하면 할수록 두보의 영혼은 맑은 산골 물과 같이 더욱 정제된 시어를 토로하게 됩니다.

“세초는 미풍의 기슭에 있고/ 높은 돛대는 독야의 배라./ 별은 넓은 들에 드리워 펼치고,/ 달은 큰 강물에 솟아 흐르네./ 이름을 어찌 문장으로 드러 내리요./ 벼슬은 늙어 병들면 물러나야 하리라/ 표표한 이 몸은 무엇을 닮았을까/ 천지 사이를 혼자 떠도는 갈매기일까”

“이슬은 단풍의 숲을 시들게 하고/ 무산무협에는 쓸쓸한 가을 기운이 감돌고,/ 강 중간 물결은 솟구치며 하늘에 닿고,/ 성채의 풍운은 땅에 드리워 어둡네.”/ 떼 국화 다시 피어 지난날의 눈물을 잣고,/ 외로운 배 한 가닥 고향생각 마음 잇네./ 겨울옷을 재촉하는 바느질이 한창이고/ 백제성 높은 곳 저물녘 다듬이 소리 급하다.”

“오늘밤 부주에서는 이 달을,/ 단지 혼자 자고 있을 방 창으로 보겠지./ 가엾게도 아이들은/ 아버지 있는 장안을 생각하는지 모를 테지./ 구름 같은 머리 쪽 향긋한 안개 적시고,/ 옥 같은 팔뚝 찬 달빛 비추겠지/ 아아 언제일까. 휘장에 기대어,/ 함께 눈물 마른 얼굴 달빛에 비출 날은.”

“두 마리의 꾀꼬리는 푸른 버들에서 울고,/ 한 줄의 백로는 푸른 하늘로 오르네./ 창문에 보이는 것은 서령 천년의 눈,/ 문 앞에 정박하는 건 동오 만리의 배.”

시성께서는 나이가 연로하고 병마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이 오히려 운율과 대구 등에 더욱 충실하면서 짜임새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있습니다.

생명의 끈을 놓을 무렵에는 학질과 폐병이 심해지면서 설상가상으로 소갈(당뇨병)과 풍비(중풍)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육신의 고통을 부여잡고서도, 태양이 수평선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는 순간의 고통을 극복하고 찬란한 노을을 비추며 가라 앉듯이 마지막 혼을 남김없이 태우는 황혼의 향연을 지그시 펼친 것입니다.

사나이의 기개가 호매하여 가락은 청심하고, 범속을 벗어난 짝구를 잘 갖춘 것도 모자라 성운의 배열이나 감정의 격이 크고 자상하여 처절한 아픔을 극복하며 평소 처신이 깨끗하고 도덕성이 엿보이는 강직한 의지와 성실함이 베어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는 바다와 같은 석양의 노을을 마지막 한 점 에너지까지 발산하는 대자연의 웅혼한 합창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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