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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의 “나눔의 소나무”
  • 기사등록 2010-11-29 16: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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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몽골초원과 세계사의 지축을 흔들었던 징기스칸은 300년을 넘어가는 나무는 보았어도 100년을 넘기는 사람은 보지를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수천 년을 살아간 나무가 있지만 당시 평균수명이 60년을 넘기기 힘들었던 시절에 인간이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스스로 제자리에 서서 온갖 풍상우로를 견뎌내고 수백 년을 살아가는 나무는 존경스럽다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님들도 마을의 오래된 나무에 오색의 천을 묶어 서낭당을 꾸리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을 지켜온 나무의 정령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종 임금의 슬픈 비사를 간직하고 있던 영월의 청령포에 가면 수령 4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있고, 둘로 나뉘어 성장한 가지가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서 있는데 그곳에는 단종 임금이 생존해 계실 무렵 수령 80년으로 둘로 갈라진 사이에 수시로 임금께서 앉아 휴식을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조가 사람을 시켜 어린 임금을 억지로 주살하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을 나무는 수백 년의 세월을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왔으며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미국의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 전문가인 예일 대의 백스터 박사는 1968년 식물에도 의식이 있다는 주제로 연구 발표를 하였습니다.

화초에게 거짓말 테스트기의 선을 연결하고 성냥을 가지고 종이를 태우려 할 때는 평온한 반응을 보이다가 잎사귀를 태우려 하자 탐지기의 눈금이 거칠게 움직였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식물과 떨어진 장소에서도 인간의 의식으로 문제의 화초에 관심을 보이거나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면 놀랍게도 그에 상응한 반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가위질이나 톱질한 사람을 등장시키면 분노의 그래프를 그린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나무에도 의식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포에 있는 “양을 산”의 체육공원에서 아래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약 40여 미터쯤 가다보면 길 오른편에 한 뿌리에서 갈라진 두 가지의 소나무가 성장하면서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방향으로 또다시 한 가지씩 뻗어 오르고 뻗어 오른 가지에서 상대방이 남겨둔 공간으로 나머지 한가지씩을 더 뻗어내면서 다른 나무들과의 공간을 다투는 형국이 아닌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좁은 공간을 최대한 현명한 방법으로 분할하여 살아가는 신기한 소나무가 있습니다.

제가 맨 처음 이 나무를 발견하였을 당시에는 가지가 신통하게 갈라졌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였을 뿐인데, 다시보고 생각해 볼수록 비록 나무이지만 현명한 판단으로 먼 훗날을 그려가는 모습에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나무가 가진 의식과 상념이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처절한 환경에서 가장 진솔한 생각으로 생존의 방식을 갈구하였던 나무에게는 자신의 이익과 대비되는 피나는 투쟁을 하는 대신에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좁은 공간이나 부족한 햇볕일망정 나누어 공유하고 더불어 공생하는 삶의 방식을 취했다는 놀라움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룩해 놓은 문명은 가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첨단으로 향하고 있으며, 말로는 성스런 주장과 온갖 철학적인 수식어로 송곳보다 날카로운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작 기본적인 맥락은 강자의 입맛에 맞는 논리로 약자의 저항을 묵살하는 본능적인 욕구와 부조리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중국 위나라의 문필 조식은 형 조비가 황제가 되어 자신을 핍박하면서 일곱 걸음을 걸어갈 시간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죽음을 내리겠다고 위협을 하자 찰나의 순간에 “콩을 삶는데 콩대를 베어 때니, 솥 안에 있는 콩이 눈물을 흘리네,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 그리 세차게 삶아 대는지”라는 칠보 시로 자신의 목숨을 구명하여 중국 5대 명시중의 한자리를 차지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가 한 가지는 황제가 되고 한 가지는 시를 지어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현상은 어떠한 논리로 누구의 정당성을 찾아야 할지 모르지만 명백하게 잘못 생각한 쪽에 정당성은 이미 부여되어 있었고, 이에 대하여 이의를 달지 못하였던 것은 논리가 뒤바뀐 형국인지 모를 일입니다.

단재 신 채호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세 번의 안타까운 순간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김 춘추가 연개소문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한 뿌리였던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반쪽의 통일을 이루었던 일, 김 부식의 극명한 사대주의에 저항하여 일어난 묘청의 좌절,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한 조선 500년 얼룩진 역사의 뒤안길에서 나라를 잃어버리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던 일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그동안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신의 허리를 잘라 분할하고 주변국에 끼친 손해의 일부를 배상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일본은 우리의 나라마저 빼앗아 합병하고 민족혼을 말살하면서 35년간 온갖 수탈과 만행을 저지르고 민족의 피와 땀을 짜내 전쟁의 소모품으로 사용한 것도 모자라, 물러가면서 독일처럼 반성하여 저희들의 허리를 반으로 잘랐어야 함에도 죄 없는 우리를 남북으로 가르는 분할 공작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고통이 지금도 뼈 속에 가득하고 남북의 대치 상황의 원인 제공이 일본에 있음에도 수시로 독도가 저희들의 영토라는 망언을 일삼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광인의 푸닥거리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것도 아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을 놓고 광복을 맞이하여 채 5년이 지나갈 무렵 동족이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수없는 인명을 살상한 것도 모자라 남북으로 높은 철조망을 쳐놓고 그로부터 60여년의 세월동안 극단적인 대치를 계속하였던 현실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를 뿐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멀리 미국, 유럽 등을 내 집 드나들 듯 다니는 시대에 그때로부터 헤어진 친인척과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도 못하고 가보지도 못하는 원통함은 또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잃고 분단의 아픔을 딛고 피눈물을 흘리며 달려온 우리민족의 서러운 역사와 폐허 위에 노심초사하여 겨우 일으켜 세운 이 땅에 또다시 피를 뿌리는 아픔을 더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에는 영원한 후진국의 멍에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동족끼리 일으켰던 6.25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은 오늘의 경제부흥의 원동력을 쌓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우리의 피 값으로 오히려 부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크나큰 시련을 주어 어찌 보면 철천지 원수라고 표현해도 이의를 달지 못할 세력에게는 경제적인 부를 뿌려 주고 정작 동족의 가슴에는 피를 부르는 실탄을 쏘아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명철한 판단력을 잃는다면 또다시 위와 같은 우를 범하여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나눔의 소나무가 가지를 뻗어가듯 조금만 신중하여 민족의 장래를 고민한다면 어딘가 그 해결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고 험난한 파도가 덮쳐온다 할지라도 바늘귀만한 틈이 있다면 그 틈에서라도 묘책은 솟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눔의 소나무가 이제 세상에 나타난 것은 위기의 시대에 무언가 우리에게 “민족공동번영”의 신령스런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그동안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가슴속에서 스스로 우러나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우리의 앞날에 대한 뜻 깊은 반추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인 것으로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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