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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문화 들춰보기: 나주 영산포 일본인 지주 가옥 다다미와 골풀 - (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부학회장겸 학술지 편집위원장 허북구
  • 기사등록 2021-08-12 09: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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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나주 영산포 거리는 '장군의 아들' 촬영지로도 잘 알려있다. 일제식 건물이 많이 지금도 남아 있는  영산포에 일본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02년부터이다. 


영산포에는 많은 일본인 진출했는데, 그중에서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는 대표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며, 그가 살았던 가옥은 지금도 남아 있다.

 

 구로즈미 이타로가 나주 영산포로 이사를 온 시기는 1905년으로 그의 나이 32세 때이다. 목포를 거쳐 나주 영산포에 도착한 그는 은행에서 농지매입자금을 빌려서 영산강변의 저렴한 땅을 사서 개간했다. 


1909년에는 영산포에서 제일가는 지주가 되었고, 1930년에는 논 487ha, 밭 239ha를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는 땅만 많은 것이 아니었고, 여러 가지 공직을 맡으면서 일제 강점기 때 나주에 진출한 일본인 중 가장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그런 만큼 그의 일본식 주택도 크고 넓었다. 현재 영산포에 남아 있는 ‘일본인 지주 가옥’으로 불리는 구로즈미 이타로 주택은 1935년 경에 지은 것이다. 


일본에서 청기와와 모든 자재를 가져와서 지었다고 하는데, 집안에는 다다미(たたみ, 다타미; 속에 짚을 5cm 두께로 넣고 위에 돗자리를 씌워 꿰맨 것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일본 전통적인 바닥재)가 있다(사진).

 

다다미는 일본 고유의 바닥재로 그 유래는 삼한시대에 우리나라에서 골풀을 가져다가 방석을 만들어 쓰다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에 에도에 수립한 무가 정권) 때에 다다미로 발전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다다미 위에서 태어나서 다다미 위에서 일생을 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인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산포에 진출한 일본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다미를 이용했다. 다다미에는 골풀이 이용되는데, 영산포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다다미를 만들기 위해 일제 강점기 초에 일본에서 육성한 골풀 품종인 와카야마2호를 도입했다. 영산포의 일본인들은 골풀의 도입과 함께 다다미 공장을 차렸다.

 

일본인들이 영산포에 다다미 공장을 차린 것은 1935년 이전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영산포의 일본인 지주 가옥을 건립했던 시기와 유사하거나 그 보다 약간 앞선 시기이다. 이것은 구로즈미 이타로 주택의 재료는 모두 일본에서 가져왔다고 하나 바닥재인 다다미는 영산포에 만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주 영산포에서 골풀을 이용한 다다미 제작은 우리나라의 화문석 제작 전통 기술과 접목되면서 빠르게 발전했고, 다다미와 화문석은 나주 영산포의 특산물이 되었으며, 1960년대부터 1970년에는 대표적인 수출상품이 되었다. 따라서 나주 영산동에 있는 일본인 지주 가옥의 다다미 등 영산포 옛 건물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다다미는 일본 문화이면서도 영산포의 골풀 문화와 무관하지 않은 유물들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나주 영산포를 차별화하는 개성 있는 문화라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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