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우리나라에서 부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견훤전’이다. ‘삼국사기 권훤전에서는 후백제의 왕 견훤이 고려 태조의 즉위식에 부채를 선물로 보냈다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인 부채는 옛날부터 선물용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부채가 선물용으로 많이 이용된 배경에는 부피가 작으면서도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다양한 종류와 품질의 부채 제작이 가능한 점과 더불어 부채가 장신구, 얼굴 가리개 등 여러 가지 목적에 이용되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조선 시대에는 부채가 선물용으로 많이 이용됨에 따라 실용품 외에 사치품화되고 화폐 대용까지 사용된 경향도 있었다.
조선 태종실록에는 부채의 대살에는 옻칠 금지령을 내린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금과 은, 옥의 장식, 상아의 사용, 정교한 세공을 하여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비싼 것은 무명베 4백 필에 해당되는 것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채가 선물용으로 많이 사용됨에 따라 부채 또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 못지않게 가치를 높인 종류, 휴대를 쉽게 할 수 있는 종류 등 다양한 것들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고문헌 속에서 부채의 명산지로 알려진 나주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부채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나주산(남평산)으로 기록된 유물 중 고급재료를 사용한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부채에는 생산지가 기록되지 않아 다른 지역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근대 부채유물 중에는 나주에서 생산된 부채가 상당히 많으나 대체적으로 고급 선물용보다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로써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진 것들이 많다. 부채 종류 또한 대량 생산이 용이한 단선(団扇·둥근부채) 종류의 유물이 많고, 부채를 전업으로 해왔던 마지막 장인 또한 단선 위주로 만들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나주부채를 논할 때는 오동잎 모양으로 만든 오엽선(梧葉扇), 부채의 중앙에 태극을 그린 태극선, 가는 살을 촘촘히 붙여 만든 세미선(細尾扇) 등 주로 단선을 논하고, 접는 부채인 접선(摺扇·접었다 폈다가 가능한 부채)과 합죽선에 대해서는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전주와 담양의 합죽선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에 따라 나주의 접선은 비중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2018년에 프랑스 파리부채박물관에서 발견한 나주산 부채는 19세기 당시 고급품으로 분류됐던 정교한 문양의 목살과 용이 조각된 상아 잣대를 사용한 희귀하고 고급스럽게 제작된 것이었다(사진).
프랑스 파리부채박물관에서 발견한 부채는 나주가 단선뿐만 아니라 접선(합죽선 등)의 명산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한 대목인데, 접선의 제작 기술은 195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 2017년과 2018년에 나주 남평 등 과거에 부채를 만들었던 곳으로 알려진 지역을 중심으로 부채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서도 합죽선의 제작되었음이 나타났다.
나주 청동에 거주하는 박0례 씨(1931년생)는 결혼한 이후 남편이 이웃 마을인 석현마을의 부채 만드는 집에서 일했다는 제보를 해 주셨다. “부채는 석현마을의 박0민 씨(작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들었는데, 부채 모양은 부챗살이 꺾어지는 부채, 접는 부채, 네모 부채, 태극부채 등 다양한 것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즉 1950년까지 나주에서 합죽선을 대량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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