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jnnews.co.kr@hanmail.net
[전남인터넷신문]전남 농촌을 둘러보면 의외로 건물이 많다. 마을회관, 경로당, 다목적센터, 창고, 각종 공모사업으로 지어진 체험관과 홍보관까지 외형적으로는 시설이 풍부해 보인다. 그러나 김장철이 되면 농촌 주민들이 가장 먼저 내뱉는 말은 단 하나다. “도대체 김치를 어디서 담가야 하나.” 건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김치를 담글 공간은 없는 모순적 현실이 전남 농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마을 단위 공동 김장 공간 부재다. 지난 수년 동안 지자체는 농촌공동체 활성화를 목표로 다양한 건물을 건립해 왔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회의실·사무실·전시실 중심의 용도 위주 설계로, 주민 생활문화의 실제 요구를 반영하지 못했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며 세척·발효·저장을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은 대부분 배제되었다. 외형은 화려해졌지만 생활은 비워진 상황이 된 것이다.
둘째 문제는 개별 농가 주택 내 전통적 김장 공간의 소멸이다. 도시형 주택 구조의 확산, 콘크리트 포장 마당, 장독대 철거, 농기계 보관창고 증가 등으로 과거 김장을 준비하던 생활공간이 대부분 사라졌다. 예전에는 집 마당 한켠에 장독대와 넓은 작업 공간이 있어 이웃이 드나들며 함께 김장을 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러한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김장 공간의 감소는 단순한 편의성 문제를 넘어 공동체 문화의 약화로 이어진다. 김장은 한 가족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행위이면서 마을 구성원이 서로 돕고 삶의 경험을 나누던 중요한 의례였다. 이웃이 함께 배추를 절이고 나누던 소소한 대화들은 공동체 정서를 쌓는 기반이었다. 공간이 사라지면 공동체도 약해진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공동 김장 공간의 부재는 농촌–도시 교류와 지역 소득 창출 기회 상실을 의미한다. 같은 지자체 내 아파트 주민들과 농촌 마을이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도시 주민이 농촌을 방문해 지역 농산물로 김치를 담가 가는 체험이 가능하다. 이는 지역민 화합뿐 아니라 새로운 농촌 소득 창출의 기회가 된다. 그러나 공간이 없어 이러한 프로그램을 추진하지 못하는 마을이 많다.
결국 주민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것은 지역 간 화합·교류·경제 활성화라는 세 가지 기회를 한꺼번에 잃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자체는 이처럼 실질적으로 필요한 생활 기반시설을 만들기보다, 체험시설·홍보관 등 전시성 건물 건립에만 관심을 쏟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지어진 공간은 활용도가 낮아지고 유지비만 부담되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전남 농촌에 진정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건물이 아니라 실제로 생활을 지탱하는 생활문화 공간이다. 농촌의 삶과 문화를 지탱할 수 있는 기능적 공간, 주민 생활동선과 노동을 이해한 실용적 공간, 그리고 공동체가 다시 모일 수 있는 공유공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배추 절임·세척·버무림·발효·저장까지 가능한 거점형 생활 복합공간을 마련해 주민 불편을 해소하고, 이를 마을 수익사업으로 연계해야 한다. 더 나아가 김치 담그기를 매개로 도시–농촌 간 교류프로그램을 활성화하면 농촌 소득 증대, 공동체 회복, 지역 농산물 소비 확대라는 세 가지 성과를 동시에 거둘 수 있다.
전남 농촌에는 건물이 넘쳐나지만, 사람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문화적 공간도 비어 있다. 김장을 어디서 담그느냐는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니다. 농촌이 건물만 늘릴 것인지, 아니면 생활문화의 기반을 되살릴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다. 건물 외형의 증가나 새로운 시설 건립이 농촌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미 있는 시설을 실제 필요한 공간으로 재구성해 알차게 활용할 때 농촌의 활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전남 농수산물, 이제는 김장 플랫폼이 필요하다.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 농업칼럼(2025-11-25).
허북구. 2025. 지역 농산물과 식문화 보고, 반찬가게.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 농업칼럼(2024-02-13).
허북구. 2025. 전남의 산지 김치와 반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 농업칼럼(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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