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7만3천년경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있던 세계 최고 토바호의 화산 대폭발로 인하여 화산재가 온 지구를 뒤덮어 태양빛을 차단하자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지면서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빙하기(맘모스가 풀을 입에 문채로 냉동)가 도래하였고, 지구는 암흑으로 뒤 덮혀 이로부터 헤어나는데 꼬박 6만3천년이 걸렸다 한다.
기원전 1만년 경부터 대지에 하늘의 빛이 암흑을 뚫고 내리기 시작하여 새로운 생명들이 태동 하면서 인간의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는데 한임의 3301년의 시대가 지나고, 환웅천황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5909년 전(기원 전 3898년)태백산 신단수에 신시를 베풀어 사람을 비롯한 만물의 자리를 각기 정하시더라.
천황께서는 ‘고시(高矢)’로 하여금 사람을 먹여 살리는 임무를 맡기므로 이를 주곡(主穀)이라 하였다.
농사의 방법이나 불씨도 없던 시절에 고시는 사람을 살리는 궁리를 하며 숲에 들어 골똘히 생각에 매달려 있는데 홀연히 큰바람이 불어 오래된 나뭇가지를 서로 비벼대며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깨달음이 있어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완전하지가 않아 또다시 숲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드는지라 돌을 집어 크게 한마디 외치고 던졌는데, 겨냥이 틀려 바위에 부딪히며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고 마침내 돌로 쳐서 불을 만들었더라.
천황께서는 또다시 신지 ‘혁덕’에게 명령과 의사를 전달하는 문자를 만들도록 하셨는데, 어느 날 사냥에 나가 암사슴을 쫒다가 종적을 놓치고 사방을 수색하면서 평평한 모래밭에 이르러 사슴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널려있는데도 향한 곳은 절로 확연하여, 크게 깨닫고 만물의 모양을 자세히 관찰하여 태고의 문자를 만들었더라.
풍백 ‘석제라’에게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피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으나 동굴이나 흙구덩이에서 사는 사람들이 습기와 바람으로 질병을 일으키고, 너무 급하게 짐승을 쫒아버려 이를 잡는데 불편함이 있게 되었다.
우사 ‘왕금영’으로 하여금 사람의 살 곳을 만들고 온갖 짐승들을 모아 목축을 관장토록 하고,
운사 ‘육약비’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의 법을 정하도록 하고,
‘치우’로 하여금 세세토록 병마도적을 관장하도록 하여,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관직을 수행한 후손들이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한웅께서는 다스리기 어려운 종족 중에 성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약탈만을 일삼던 호랑이족과, 어리석어 사람을 따르지 않고 마음이 세어 조화되기를 거부하는 웅족을 교화하기 위하여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씩을 각기 나누어 주고 신비한 주문을 외우고 “너희들 이를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저절로 참된 평등을 이루어 만물을 구제하고 쉽사리 사람까지 교화하는 도리를 아는 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신묘한 수련법(조식보정의 단전호흡으로 추정)을 전수하였음에도 호랑이는 참을성이 없어 태만하여 경계를 지키지 못하고 웅족은 인내와 끈기로 천업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웅께서 끝내 호족(흉노와 스키타이)은 사해로 멀리 쫒아버리고, 웅족(묘족, 예맥, 동이, 부여)은 거두어 혼인하여 자식을 잉태케 하였다.
신시에 이미 칠회 제신의 책력이 있었는데, 첫째 날에는 천신에, 둘째 날에는 월신에, 셋째 날에는 수신, 넷째 날에는 화신, 다섯째 날에는 목신, 여섯째 날에는 금신에, 일곱째 날에는 토신에 제를 지냈다.
한웅천황 거발한으로 부터 18대 1565년 동안 신시의 나라가 있었으니 처음부터 그 연대를 정리 하자면,
1대 거발한(한웅천황) 기원전 3898- 3804 (천수 120세/재위 94년)
2대 거불리 기원전 3804-3718 (천수 102세/ 재위 86년)
3대 우야고 기원전 3718-3619 (천수 135세/ 재위 99년)
4대 모사라 기원전 3619-3512 (천수 129세/ 재위 107년)
5대 태우의 기원전 3512-3419 (천수 115세/ 재위 93년)
6대 다의발 기원전 3419-3321 (천수 110세/ 재위 98년)
7대 거련 기원전 3321-3240 (천수 140세/ 재위 81년)
8대 안부련 기원전 3240-3167 (천수 139세/ 재위 96년)
9대 양운 기원전 3167-3071 (천수 125세/ 재위 100년)
10대 갈고 기원전 3071-2971 (천수 149세/ 재위 92년)
11대 거야발 기원전 2971-2879 (천수 149세/ 재위 92년)
12대 주무신 기원전 2879-2774 (천수 123세/ 재위 105년)
13대 사와라 기원전 2774-2707 (천수 100세/ 재위 67년)
14대 자오지 기원전 2707-2598 (천수 151세/ 재위 109년)
15대 치액특 기원전 2598-2509 (천수 118세/ 재위 89년)
16대 축다리 기원전 2509-2453 (천수 99세 / 재위 56년)
17대 혁다세 기원전 2453-2381 (천수 97세/ 재위 72년)
18대 거불단 기원전 2381- 2333 (천수 82세/ 재위 48년)이었다.
한웅천황으로부터 다섯 번 전하여 태우의 한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호흡을 고르는 선도를 통하여 불로장생의 술법을 깨우치도록 하였다.
어느 날 삼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시고는 만 가지 이치를 통철하고 곧 삼신산으로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괘도 (태극, 음양, 팔괘, 효 등)를 천하에서 얻으시니 세 번 끊어졌다 이어지고 자리를 바꾸면 묘한 이치를 나타내고 천지인을 포함하여 변화가 무궁하였다.
12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를 ‘다의발’이라 하고 막내를 ‘태호’ ‘복희’라 하였다.
다의발은 6대 한웅에 올랐고 태호 복희는 신시의 우사가 되었다.
태호 복희는 신용의 변화를 감지하여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를 바꾸어 갑자를 처음으로 하여 60갑자와 환역(오늘날의 주역)을 지어 완성 하였다.
밀기에 이르기를 태호 복희는 청구와 낙랑을 거쳐 진(震)으로 옮겨 갔다. 그의 후예들이 풍산에서 나누어 살더니 ‘풍’씨를 성으로 삼고 ‘희’족이라 하였다.
마침내 갈라져 패, 관, 임, 기, 포, 이, 사, 팽의 여덟가지 성씨가 되었으며,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의 거처가 있다.
임, 숙, 수, 구, 수유(말기 기자의 후손이 왕이 되었던 번한조선(삼한중의 하나))의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나중에 번한조선은 마지막 왕 기준이, 한고조를 도와 개국의 공신이었던 ‘노관’이 한고조의 사망으로 실각하자, 노관은 흉노에 의탁을 하고 그의 부장으로 떠돌이 도적인 위만은 기준에게 의탁을 하였는데, 100여리의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음에도, 한의 군대가 쳐들어 온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기준을 속여 군사로 들이쳐 나라를 빼앗자, 기준이 항거하다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못하였다.(식민사관이 우리민족의 뿌리를 다른 두 개의 단군 조선이 있었음에도 위만조선에서 찾고 있는 현실은 통탄할 일이다. 위만 조선은 단군시대임에도 중대한 대목이기에 언급)
태호 복희는 기원전 3528-3218년 동안 존속하였던 진제국(震帝國)의 시조가 되었는데 신시의 배달나라 제후국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음식을 섭취하기 전에 취하던 “고시례”의 당사자이자 신시시대의 농관을 지내 우리민족 최초의 ‘농사의 신’인 ‘고시’의 후손으로 소호와 소전이 있었다.
‘소전’은 8대 한웅 ‘안부련’의 신하로 아들 염제 ‘신농’을 낳고 후손에 ‘공손’을 두었다.
소전은 배달나라의 병사를 맡으면서 백성들이 정착해 농사를 짓도록 하고 곡식과 옷감, 약과 건축의 기술을 전파하고, 저자를 이루어 교역하도록 하면서, 나중에는 배달나라의 제후국인 유웅국(有熊國)을 세워 그 시조가 되었다.
그의 아들 염제 신농은 아버지 소전에 이어 배달나라의 우가를 맡아보다가 기원전 3218-2698년에 걸쳐 존속하였던 염제국(炎帝國)을 세워 시조가 되었으며,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일일이 맛을 보아 약을 만들고 한족이 농사의 시조로 떠받드는 삼황중의 한분이 되었다.
염제 신농은 유망이라고도 하였는데, 500여개의 부족을 통합하여 배달나라 식으로 군대를 훈련하고, 황하강 상류 화산일대에서 구리를 캐어 배달나라와 유사한 청동무기를 생산하고, 중류에 있는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군량으로 확보하고, 하류 태산일대의 공상씨 부족을 점령하고 수도를 이전하여 뽕밭에서 나오는 누에로 비단을 생산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 배달나라 제후국으로서의 속박을 벗어나 중화권의 자주를 회복하려 치우천왕에 대항하였다.
염제국은 나중에 기원전 2698-2333년까지는 그 체제를 그대로 단웅국에 승계하여 존속을 하였는데, 18대 한웅 거불단의 아들 단군 왕검이 계승을 하여 단군시대를 열었다.
13대 사와라 한웅의 초기시절 소전의 별고(아비 없는 자식으로 서자)에 공손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기르는 업무에 종사하면서 태만히 하므로 헌구로 유배를 시켰다.
황제 헌원의 무리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4대 자오지한웅을 치우천황이라고도 하는데 신시의 옛 힘을 받아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고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능히 하늘에 제사지내 삶을 알아 땅을 열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하며, 온갖 사물의 원리를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시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고 갖추지 못한 힘이 없었더라.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 자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 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만들어 신농유망이 쇠퇴하는 틈을 타서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한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여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웠더라.
때에 신농 유망은 또다시 소호를 내세워 치우천황을 상대로 마주 싸우게 하므로 예과와 옹호 극을 휘두르며 크게 싸우고,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을 혼미케 하니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고 유망도 함께 도주하니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천황께서는 드디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 하였다.
신농 유망이 쇠퇴하고, 공손 헌원이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감히 혼자 병마를 길러 황제에 즉위하여 천황을 공격하므로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에워싸 쳐들어가서 이를 전멸 시켰다.
헌원은 매번 싸움에 지면서도 굴복하지 않으므로 구군에 명하여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여 탁록의 유웅에서 큰 안개를 일으키며 싸움을 독려하니 죽는 자가 넘치고 두려움에 도망가 숨으니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니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천황께서 쇠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사용하자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모래를 먹고 사는사람으로 알았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후 10년 동안 헌원과 치우천황이 약 73회에 걸쳐 싸웠지만 헌원은 한 번도 이기지 못하였으며, 배달나라를 본떠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의 수레를 만들어 또다시 대항하는 헌원에게, 치우천왕은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개발하여 공격하니 감히 대항하여 싸울 뜻을 펴지 못하였다.
당시 천황의 군사 중에 ‘치우비’라는 자가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불행하게 죽었는데, 사마천은 사기에 “치우를 잡아 죽이다”고 기록하였다.
사기에 이르되 “산을 뚫어 길을 내고 한 번도 편안히 있은 적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헌원이 전전긍긍하였던 삶을 옆에서 보는 것과도 같다.
“한서지리지”에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한줄기 붉은 띠 모양의 연기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 하였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바가 있어 천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이후 유망과 헌원은 원한이 깊어 졌음에도 스스로 기세에 눌려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실제 한족의 시조로 치는 헌원은 진나라의 도사인 갈홍의 ‘포박자’라는 책에 “옛날에 황제 헌원이 있었다.
그가 동쪽으로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 자부선생을 뵙고 삼황내문을 받아 이를 가지고 만 가지 신을 부렸다”고 적혀 있으며 공공, 헌원, 창힐, 대요의 무리가 모두 동이의 선각자인 자부선생의 청구국 대풍산 남쪽 삼청궁에서 배웠으며, 삼황내문은 신시의 녹서로 기재되어 세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전한다.
헌원이 자부선생의 가르침에 감복하여 한때 맘을 씻고 의에 돌아왔으니 나중에 도가의 무리들에 의지하는 바가 되었다.
기자가 말한 ‘홍범 구주’가 아니면, 을파소가 전한 성, 신, 애, 제, 화, 복, 보, 응의 8조에서 비롯되는 인간사 366사를 주관하는 ‘참전계경’이 아니었는지 의문이 갈 뿐이다.
헌원의 아들 소호 금천(기원전 2598-2515), 손자인 전욱 고양(기원전 2514-2437), 증손자 제곡 고신(기원전 2436-2367), 고신의 막내아들 제요 도당(요임금, 기원전 2357-2284), 헌원의 둘째 아들 ‘창의’의 6세손 장님인 ‘고수’의 아들 제순 유우(순임금, 기원전 2284-2224)를 합하여 5제라 한다.
한족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삼황오제는 모두 우리 민족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나머지 하, 은(상), 주의 제왕들도 그 뿌리는 모두 동이에 있다.
신시시대로부터 펼쳐진 태백산은 백두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이 되며, 삼신산으로 불려져 왔는데, 선가서(仙家書)에 가로되 “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 한다”고 기재되어 아마 산삼을 지칭하고, 조식보정의 단전호흡법에 의하여 신묘한 도를 깨우쳐 장수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산삼을 취식한 뱀이나 짐승들이 탈색이 되어 백색을 띠어 발견되는 사례가 있고, “새. 짐승. 풀. 나무가 있으나 모두 희다”는 괄지지(栝地志)의 기록과, “단군 오사구의 원년 북쪽을 순시한 때, 영초를 얻다”라는 세기(世紀)의 기록 등은 진시황이 불로초로 알았던 것이 산삼을 지칭한 것으로 당시에는 신령스러운 백두산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370. 5. 2. 인시에 박달나무 아래서 처음으로 단군 왕검이 태어났는데, 14세 때인 기원전 2357년에 염제신농이 세운 염제국을 계승한 단웅국의 비왕으로 임명되어 24년이 지난 38세 무렵, 아버지인 18대 한웅천황 거불단이 전쟁 중에 붕어 하시니, 기원전 2333년 무진년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 터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어 이후 단군시대의 개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참조: 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신채호 조선상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