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 3. 6. 제물포항(인천항)에서는 청운의 꿈을 찾아 고국을 등지고 머나먼 이역만리를 향하여 남자 802명과 여자 207명, 어린이 24명을 포함한 총 1033인이 영국의 상선 일포드 호를 타고 태평양의 거친 파고를 향하여 기약 없는 항해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75일간에 걸쳐 이어지는 혹독한 항해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간절하게 꿈꾸던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지도 못한 채 망망한 대해에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곳은 멕시코의 남부 살리나 크루즈 항 이었고 육로로 다시 북상하여 같은 해 5월 12일 베라크루즈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단 3일의 휴식을 마치고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로 후송이 된 다음, 대부분은 로프 줄 생산에 필요한 ‘애니깽(용설란)’이라 불리는 선인장 농장과 시멘트광산, 개간 사업지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에 젖은 순간은 잠시뿐이고 혹독한 노동과 탄압으로 노예나 다름이 없는 생활로 죽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처참한 환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메리다시에 거주하는 허훼이라는 중국인이 한인 노예들의 비참한 실상을 중국인 친구에게 편지로 보냈는데 그 내용이 중국신문에 게재 되었을 뿐 아니라, 황성신문이 1905년 7월 29일자 신문 사설에서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등급이 5에서 6등급이고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나 떨어진 옷과 짚신을 신고서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마치 가축 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당시 그곳의 돼지 한마리가 80전 이었는데 한국 노동자 한사람의 몸값은 불과 30전 이었다”고 보도하고 무책임한 동양척식회사의 이민 정책을 비판 하였습니다.
하지만 무능한 왕조는 이미 외교권을 비롯한 중요부분의 통치권을 모두 일본에 빼앗긴 뒤라 이민자들을 위하여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031명 중 만고풍상을 다 겪고서 일부 288명은 질기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애니깽 보다는 사탕수수 농장의 작업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또다시 바다를 건너 쿠바로 향하게 됩니다.
때마침 사탕수수의 국제적 가격이 폭락함으로써 그나마 인부를 고용하지 못하게 된 현지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애니깽 농장으로 가서 일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농장주들의 채찍과 억압에 못이겨 이민자들은 비밀회의를 통하여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비참한 현실을 나라님(임금)께 알려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두 사람의 특사를 파견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특사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이로부터 무려 15년 동안 온갖 장애를 넘고 마치 바다위에 떠다니는 낙엽처럼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드디어 우리나라 서해안의 이름 모를 갯벌에 상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만난을 극복하고 도달한 조국은 이미 일본에 의하여 주권을 빼앗긴지가 오래되었는데, 결국에는 일본 군인들에 의하여 체포가 되어,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엉뚱한 죄목으로 총살형을 당하는 기막힌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기둥에 손이 뒤로 묶이고 눈이 천으로 가려진 두 사람은 지나간 날들의 회환과 억울함 뿐만 아니라, 두고 온 동족들의 참상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조국의 산하에서 목숨조차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대며 우러나오는 처절한 소리로 “아리랑”을 목매이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역사를 바로 깨우치지 못하고 백성을 자식과도 같이 사랑하지 못한 군신들의 실정과 함께, 나라의 올바른 정기를 똑바로 세우지 못하여 패망한 왕조의 백성들은 빼앗긴 들판에 사무치게 퍼져가는 메아리만 남기고 속절없이 최후를 맞이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00여년의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동안 두 사나이가 조국의 광복을 그리며 애타게 불렀던 간절한 염원은 단 한 번도 그 명맥이 끊이지 않고 면면하게 이어지며 민족의 가슴속에 살아 생동하는 음률로 끝없는 파문을 물수제비처럼 몰고 온 것입니다.
삼국시대에 서민들 사이에 유행하였던 노래로 ‘오늘이 오늘이소서’로 시작하는 ‘오늘’이라는 곡이 있었다고는 들었지만, 아리랑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민족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유전이 되며, 무언가 꿈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구원의 대상으로 노방초와도 같이 질긴 생명력을 발휘 하였습니다.
2000년도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한이 한반도 깃발을 흔들며 공동으로 입장을 하고 응원을 펼치는 동안에도 아리랑은 한결 같이 우리들모두의 응원가이자, 목이 터져라 부르는 애국가이기도 하였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세계인들의 가슴에 노랫말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고개를 넘나는 듯한 가락의 오묘한 음률을 깊숙하게 각인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동북공정에 눈이 먼 중국은 우리나라의 전통을 자신들의 변방문화로 치부하고 심지어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인 아리랑을 자신들의 것으로 등재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순수한 우리의 음식인 김치까지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빼앗으려 호시탐탐 노리고, 일본인들은 김치를 상업화하여 미국 등에 수출을 하여 잇속을 챙기는 그야말로 쌍방향의 침탈에 시달리는 고단한 형국에 놓이기도 하였습니다.
2012. 12. 6.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 7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는 우리 정부가 신청한 “아리랑”이 인류가 다 함께 공유하여야 할 우리민족만의 고유한 무형유산임을 전 세계에 공표하고 나아가 세계의 유산으로 공식적인 등재를 하도록 권고하게 되었습니다.
수도 없는 시련과 아픔을 견뎌내고 중국인의 야욕을 사전에 분쇄하고 우여곡절을 딛고 민족의 혼 불을 다시금 밝히는 계기가 되어 지구촌 전체의 빼어난 전통문화로 자리매김을 한 것입니다.
“아리랑”의 의미는 누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도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았지만, 수천 년 동안 민족의 가슴속에서 알게 모르게 녹아 내려 간절하게 추구하는 높은 이상으로 우리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오히려 사족이 될지도 모르지만 혹자는 ‘我理朗’이라 표현을 하여 ‘참다운 나를 깨우치는 즐거움’이라 해석도 하고, 때로는 ‘娥利郞’이라 하여 ‘아름답고 멋진 임’ 또는 ‘사무치게 그리운 임’이라고도 해석을 합니다.
쓰리랑은 ‘쓰리도록 그리운 임’이라고도 하며, 아라리는 ‘娥羅利’로 표현을 하여 ‘아름답고 비단처럼 멋지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쓰리도록 아름답고 멋진 임을 그리는 민족의 염원이 은근하게 우러나면서 구름을 탄 선녀가 나비처럼 나부끼는 음률로 잔잔하게 움직여 끈끈한 정리를 보일 듯 말듯이 나누는 것입니다.
크게 취하지도 않으면서 목마르지 않는 애잔한 우리만의 정서가 지나가는 바람결에 흔들리며 무색 무미 무취의 향내를 풍기며 지극한 사랑의 흔적이 은연중 비단결에 묻어나는 것입니다.
정든 임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연가를 뒤로하는 사나이는 산 고개 돌고 돌아가며 따라오는 애끓는 노래 가락이 끓어졌다 이어지고 또다시 이어지는 여운을 음미하다가, 급기야는 먼 곳에 서있는 여인이 비단옷을 벗는 소리인지, 아니면 깊고 깊은 겨울밤에 바람도 없이 소복소복 내리는 눈 오는 소리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염화시중의 아라리 소리에 취하여, 언젠가 떠나온 곳에 묻어둔 사무친 그리움을 찾아 되돌아 오곤 하는 것입니다.
아리랑은 구천년이 넘는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꾸려가는 동안 한시도 그치지 않은 길고도 질긴 은근의 소리가 되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오래된 전설과도 같은 영원의 읊조림이 되어 살아온 날들보다도 훨씬 더 먼 훗날까지 눈물과 한과 희망의 생명력을 노래할 것입니다.
우리 강토에서 생성하여 전파된 아리랑이 무려 60여 종 3,600여 가락이 있다고 하는데 그 오묘한 음률을 찾아내어 우리의 전통으로 삼고 면면하게 이어가는 노력을 한시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마디마다 우리의 역사와 전통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삶의 애환과 시련이 스며들어 한과 운율로 한층 승화된 정서가 속속들이 서리어 이제는 세계인의 가슴속까지 파고들어 영원히 함께 공유하여야 할 문화유산이자 지구촌의 아리랑으로 명실상부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