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지도 어언 67년여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갔습니다.
요즈음 전쟁의 참화로 미처 풀지 못하였던 은원 관계들이 지금도 얽혀 영역에 대한 집착으로 동북아의 정국이 요란스럽기도 합니다.
일본과 주변국들 사이에 벌어지는 영토분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집요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억지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비정상적인 관계들은 자국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이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여론의 화살을 극단적인 방향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상고시대부터 어느 특별한 지역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나라의 형태를 유지하는 부족국가의 관점에서 역사를 곰곰이 살펴보면, 서로 화해와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다가 때로는 갈등과 반목으로 적대시도 하고, 필요에 따라 세력 간 연합을 되풀이 하면서 희로애락의 고단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알고 보면 모두가 이웃이었거나 형제들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가 피할 수 없는 이해의 충돌로 적대관계로 변모한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동안 일본이 우리에게 끼친 수많은 피해를 생각해보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할만한 이유가 없어 보임에도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주장을 하는 데는 기가 찰 일입니다.
그렇다고 집착의 욕망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행태를 보이면서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서로 다투기에 민망스럽기도 합니다.
유전학적인 측면에서 미토콘드리아의 반응을 토대로 살펴보면 몽골과 일본 등은 사실상 우리와 한 뿌리의 종족이었다는 결과가 나온다함에도 마치 전생에서부터 원수로 태어난 것처럼 악착 같이 싸우는 것은 한마디로 서로에게는 불행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한복판 도시 지하철에서 한국인이 일본인의 생명을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경우도 있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온 새댁들이 자신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죄과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원 뿌리가 같은 형제이었으면서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원초적인 사랑의 발현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임진왜란 때의 소서 행장이 전쟁터에서 조선인 고아 둘을 입양하여 각별하게 보살펴 주었던 사례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일합방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장래가 불투명 하던 시절인 1912. 10. 31.경 운명적으로 타우치 찌즈코라는 여인이 일본의 고지현(高知懸) 약송정(若松町) 고지시(高知市)에서 부친인 덕치(德治)의 외동딸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임명을 받게 되자 7세에 어머니와 함께 모든 가족이 조선의 목포로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이후 13년간 아버지의 따뜻한 양육을 받으며 평탄하게 살아가던 중 1932년도에 부친과 사별을 하게 되면서 조산부의 일을 하는 어머니와 단 둘이 머나먼 이역 땅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1909. 6. 13경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부락에서 태어나 12세에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곤란한 생활을 하던 윤치호라는 소년 가장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마틴씨의 도움을 받아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수업을 마친 후 전남 최초의 목포 양동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는 동안 1928년경부터 다리 밑에서 떨고 있던 고아 7명을 발견하고 데려다 공생원을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1932. 12. 15경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37. 4월경 지금의 유달산 자락 언덕에 바다가 보이는 대반동에 둥지를 틀었는데, 총각의 몸으로 고아들의 의식주를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을 하였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또한 타우치 찌즈꼬는 1931년에 목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에 목포 정명여고의 음악교사로 생활하면서도 1936년부터 목포공생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2년여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밀짚모자에 슬리퍼 차림으로 항상 수수하게 지내는 조선의 청년이자, 공생원의 설립자인 윤치호로부터 청혼 요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며 봉사하는 자세에 목포사람들은 그를 거지 대장이라 부르며 존경의 표시를 하였는데, 그러한 모습의 사심 없는 청년에게 호감을 느끼고 모친의 권유도 있어 두 사람은 1938. 10. 15경 백년해로의 가약을 맺고 서로 힘을 합하여 외롭고 불쌍한 고아들의 뒷바라지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1945년 패전으로 모든 일본인이 돌아가야 함에도 목포에 남아 남편인 윤치호와 함께 묵묵히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응징하려 하자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보호하여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이 목포를 점령하여 인민재판에 회부하였을 때도 마을 사람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무죄를 호소하였으며, 남편인 윤치호는 차라리 자신을 먼저 처형해 달라며 간곡하게 부탁을 하므로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1951년에 전쟁으로 인하여 원생이 무려 500명으로 늘어나자 원장인 윤치호는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광주 방면으로 식량을 조달하려 했으나 행방불명으로 실종이 되었습니다.
윤치호는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의 내일은 걱정이 없다.”는 좌우명만을 남기고 초연히 이 세상을 떠나간 것입니다.
일본인이면서도 남편이 남기고 간 고아들을 아무런 불평과 흔들림도 없이 희생과 봉사로 키워내는 인고의 세월을 마다지 않음으로 이 땅에 평화와 사랑의 이법을 아낌없이 전파하였습니다.
숭고한 뜻에 감복하고 주변의 가감 없는 칭송으로 한국 전쟁 고아의 어머니로 추앙을 받는 그녀에게 대한민국은 1963년도에 비록 지극한 공덕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문화훈장을 추서하게 된 것입니다.
1965년도에는 목포시민들이 간곡한 뜻을 모아 자랑스런 목포시민으로 추대를 하고 조그만 상을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남편이 목숨을 바쳐 고생하며 시작한 공생원을 언젠가 남편이 돌아 올 것이라 믿으며 지켜온 것뿐이며, 사실은 아이들이 더 많은 고생을 겪었다’고 토로한 것입니다.
이후 일본 황실에서도 고아들을 아낌없이 돌보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하여 1968년도에 남수포 상을 수여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유지를 받들어 우리나라의 동량들을 무려 3,000여명 이상 훌륭하게 키워낸 것입니다.
이토록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공덕을 남기신 분에게 하늘이 그동안의 외로움과 고난을 거두어가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연하게도 1968. 10. 31. 57세의 생일을 맞이한 날, 한없이 사랑하던 수많은 원생들을 뒤로하고 이 세상을 영면하신 것입니다.
갸륵한 뜻에 감복한 목포시민들은 고인의 마지막 길을 온 시민이 함께하는 시민 장으로 모셨는데, 당시 약 30,000명의 목포시민이 영결식을 치르고 남편의 선영으로 향하는 길가에 애도의 눈물을 뿌렸다고 합니다.
1995년도에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극적인 일생을 그린 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한일합동으로 제작을 하였으며, 그 수입금은 재일 한국인의 노인 홀인 ‘고향의 집’에 전액 기증 되었다고 합니다.
1997. 10. 31경 그녀의 생일에 맞추어서 일본의 고지 시에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주변에는 그녀가 양육한 고아들의 숫자에 맞추어 약 3,000여개의 조약돌을 일일이 나열하여 장식하였다 합니다.
2008. 4월에는 재일교포 출신 격투기 선수인 추성훈 씨가 목포 공생원을 위로 방문 하여 금일봉의 기부도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도 고인의 고결한 유지가 깃들은 공생원에는 외손녀이자 원장인 정 애라씨와 함께 직원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약 67명의 아동들을 정성스레 보살피고 있으며, 어린 새싹들은 미래의 꿈을 착실하게 키워가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 고아의 어머니 한국명 “윤 학자” 여사의 숭고한 뜻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올해로써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2012. 10. 29. 14:00경부터 서울 여성플라자에서 시작되는 개막식을 필두로, 탄신일인 31.경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에서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 및 세계 고아의 날 제정추진선언대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고인의 일생을 통하여 한일관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새로이 조명해보고 아득해 보여 지는 평화의 길을 향하는 우리의 간절한 염원과 함께, 보다 긍정적인 세계질서를 꿈꾸는 인류의 지혜가 얼마나 무궁한 것인지를 시험받는 무대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는 일이야 말로 무색 무미 무취인 인간의 향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성스런 순간이고, 이 세상의 어떠한 장벽인 철옹성도 녹여버릴 수 있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용광로가 될 것으로 보여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