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 지긋지긋하던 더위가 한풀 잦아들고 별빛이 유난스레 초롱초롱해지며 밤바람은 가슴을 시원하게 스쳐가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오면, 구들장이나 담장 밑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또랑또랑하게 울려 퍼져 천지에 가득하고 한없이 맑아지는 청량한 정신은 계절의 진수를 온몸으로 만끽하게 된다.
젊은 날 친구들과 어울려 초저녁에 막걸리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와 순간의 외로움이 찾아드는 동안 문득 내쳐 놓았던 책을 들고 빠져들기 시작하면 날이 새는 줄도 몰랐던 그 열정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유난히 풀벌레가 성하여 밤이면 울어대는 소리가 귀청을 때려 우리로 하여금 더 한층 감성적인 유혹에 빠지게 하였던 것 같다.
지금도 가을이 오면 아무런 이유 없이 무언가에 설레는 느낌이 있는 것은 매 한가지고 단지 열정에 있어 약간 퇴색이 되었을 뿐 밀쳐 두었던 계획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수년전 이 무렵 인데 현세로부터 무려 이천년 전의 인물이지만 그때로부터 또다시 이천년 세월을 극복하고 중국 고대 역사의 현장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한 기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중국 섬서 성 용문 하양에서 한 무제의 천문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 사마 담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 담이 평생의 꿈이었던 사기를 저술하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유언으로 그 완성을 부탁하기에 이르렀음에도 각박한 현실에 매달려 차일피일 미루다 안타까운 세월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혈기가 왕성하였던 이릉이라는 인물이 조정원로들과 한 무제에게 병력 20만 명을 지원해주면 북방의 흉노족을 깨끗이 평정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실제로 이릉에게는 5,000의 병사와 함께 북방으로 파견되어 후방 교란의 임무가 주어지고 자신의 군사보다 훨씬 많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연전연승을 하다 귀로에서 식량이 떨어지고 기력이 쇠하여 흉노의 8만 군대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릉은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고 조금의 지원병만 보내주도록 간절히 애원하였지만 조정 대신들은 코웃음을 치며 그 용맹을 무시하여 지원병을 보내지 않으매 처절하게 저항하던 장군은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절개를 굽혀 투항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평소 의협심이 강했던 태사령 사마 천은 “이릉에게도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두둔한 것이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이로 인하여 48세가 되던 해 남자로서의 생명을 말살하는 궁형에 처해지고 3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사마 천은 조정 대신의 멸시와 사람들의 질타를 이겨내면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며 삼황오제 때부터 한 무제 때까지 무려 이천년에 걸친 본기 12편, 표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130여 편에 걸친 정사에 나타난 역사적 인물들뿐만 아니라 자객, 글쟁이, 총신, 익살꾼, 점쟁이, 장사꾼, 이민족 등 역사의 사각지점을 살았던 이들의 삶을 발굴하여 특징적이고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흘러간 세월 속에 묻혀버린 중국고대의 기인들과 평범하였더라도 귀감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사 속으로 끌어내어 그로부터 또다시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바로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편의 드라마를 장쾌하게 엮어낸 것이다.
이로써 무려 수천 년의 세월을 아우르는 실로 놀랍고도 경이적인 위대한 역사의 혼 “사기”가 우리 곁에 우뚝 서게 되었으니 실로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킨 인간승리의 금자탑인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편견을 뒤집어 고난과 역경을 스스럼없이 극복한 인물이 있다.
그 분은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치며 진주 목사를 지낸 김 시민의 손자로 아버지 김치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는데 정작 본인은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은 후 기억력이 떨어져 모든 사람이 공부를 포기하여야 하는 둔재로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 김치는 태몽 꿈에 노자를 만났으니 노자의 정령이 깃들은 아이라면서 “나는 저 아이가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니 오히려 대견스럽네. 하물며 대기만성이라 하지 않았는가”며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10세에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전혀 진척이 없었고, 20세에 겨우 시 한수를 지었음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서산, 이라는 책 읽은 횟수를 기록하는 도구를 만들어 놓고 동서고금의 명저를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었는데, 사기의 “백이전”은 11만 3천 번, 노자전등 7편은 2만, 중용서등 4편은 1만8천, 백리해장등 3편은 1만5천, 사설등 18편은 1만 3천, 제악어문은 1만 4천, 전 36편을 1만 번 이상 읽어 자신의 “고문 36수 독수기”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1만 번에 이르지 못한 책들은 비록 올리지 않았다 하드라도 옛 어른들이 억양을 넣어 소리 내어 읽는 형태로 1만 번을 넘겼다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가히 상상이 가지 않을 뿐이다.
이토록 더딘 발걸음으로 백곡 김 득신 선생님이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결과 후일에 무려 1600여수에 달하는 한시 작품과 스스로 작성한 묘비에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뿐이다”는 문장과 함께 17세기 조선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에서도 엉덩이에 곰팡이가 피고 오른팔이 마비가 되고, 탈장 수술까지 받으면서도 매일 하루 원고지 30매를 꼬박 꼬박 채워 20여 년 동안을 지탱하여 오신 분이 계신다.
대하소설 10권을 완성하려면 약 1만 5천이상의 원고지가 필요하고 최소한 5년여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간의 삶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식사하고 쉬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저술 활동에 투자하는 시간이 하루에 13시간 정도였다니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대하소설 3부작으로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인물이 약 280여명,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이 약 600여명, “한강”에 등장하는 인물이 400여명이나 되었다는데 어떻게 하여 제 각각의 등장인물에 대한 독창적인 성격묘사가 가능하였는지, 작품속의 완벽한 한 인간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는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방대한 작업을 하시는 동안 때로는 벽에 부딪히는 막막함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 난관을 극복하시는 선생님의 의지가 가히 인간의 경지 이상으로 위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앞에서 지켜본 세 사람의 현자들을 보고 인간의 심성을 쉬지 않고 연마하다 보면 우주의 섭리에 이를 수도 있다는 지론이 결코 헛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고, 인간으로서의 끝없는 정진 뒤에는 상상을 초월한 대 반전이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성현들과 당대의 석학들이 삶을 영위하면서 제 각각 스스로 품었던 생각과 의지뿐만 아니라 후세에 남기고 싶었던 말 한마디 등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우리 세상 하나의 거대한 깃발로 세워지고, 돌과 나무와 초목의 정령들이 온몸을 짜내 이룬 깊은 골 옹달샘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의 양식이 되고 나아가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뜻있는 사람들이 지혜를 짜내어 한 방울씩 보태어 지어지는 이세상의 수많은 책속에는 후세를 위해 펼쳐놓은 반듯한 길이 있고,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물을 뿜어내 지나가는 나그네와 산짐승과 새들이 목을 축이도록 배려하고, 흐르는 바람과 구름마저 투명한 거울 같은 옹달샘에 자신을 비추어 잃었던 길을 다시 찾아 표표히 떠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