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조선시대 서유구 선생의 지도 아래 연꽃 세 송이와 진주토종작은키통밀가루, 수제닥나무창호지 그리고 사람들의 손이 모였다. 2026년 10월 3일 담양군 창평면에서 열린 슬로푸드한국협회 담양지부의 연화초 재현 첫 모임이다. 회원 83명 가운데 선착순으로 신청한 20명과 관심 있는 참여자 등 모두 30명이 서유구의 『정조지』를 오늘의 밥상으로 불러냈다.
이날의 시작은 연화초를 빚기 위한 연화곡, 곧 연꽃을 넣은 누룩 만들기였다. 진주 작은키통밀가루 600그램, 백련꽃 세 송이를 더해 오리알 크기 일곱 개로 빚었다. 이를 닥나무종이에 싸서 바람이 통하는 곳에 두고 21일 동안 황금색 곰팡이를 키워낸다. 일교차가 커지는 날씨라 마음은 조심스러웠지만, 옛 기록을 손으로 따라가 보는 데 뜻을 두었다.
백련꽃은 내게 고향의 기억이다. 강진 금당리의 연못에서 피어오르던 백련의 청초함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진흙에서 퍼올려지는 흰색이다. 발효 또한 오랜 옛날의 시간 속에서 생명을 길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조지』의 식초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먼저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 연화초였던 이유다.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고, 손으로 재료를 만지며 천천히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마음을 쉬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화초 재현은 옛 음식을 되살리는 일이면서 나에게는 기억과 마음을 잇는 작은 치유의 시간이기도 했다.
혼자 품었던 꿈에 회원들의 손이 보태졌다. 수분을 살피고 조심조심 모양을 잡는 동안 연화곡은 갓 낳은 오리알처럼 뽀얗게 놓였다. 함께 반죽을 만지고 모양을 만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는 결과물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 일상의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고, 옆 사람과 웃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생활 속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제로 만든 무표백 닥나무종이를 준비한 것도 옛 방식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에서였다. 다만 옛 기록의 재현과 오늘날의 식품 안전 확인은 함께 가야 한다. 발효의 상태를 꾸준히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도 이번 시도의 중요한 몫이다. 흑초 농사를 지은 지 25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미생물을 다루는 일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키워가는 일이다.
저녁식사는 같은 앉은뱅이밀 통밀가루로 칼국수를 끓였다. 애초에는 모두 함께 반죽하고 면을 썰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여름 마당에 덕석을 펼치고 일가친척 30여 명이 둘러앉아 팥칼국수를 먹던 기억이 나를 그런 기획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미리 만들어 보니 추억만으로 서른 명의 식사를 준비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항상 함께하는 송명순님이 많은 양의 반죽을 도맡았다. 쉰 명도 먹을 법한 반죽 앞에서 나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느꼈다. 다시마와 멸치, 남편이 농사지은 대파로 아침부터 육수를 내고 바지락을 더했다. 끓여낸 면은 예상과 달리 펙틴함유율이 낮아 올챙이 국수 같은 모양이 됐다. 반듯한 칼국수는 아니었지만, 그릇마다 준비한 이들의 수고가 담겼다.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음식을 먹는 시간에는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렸다. 내게 그날의 감칠맛은 감사의 맛이었다.
담양지부의 슬로건은 ‘혼자 하면 일, 함께하면 놀이’다. 함께 만들고 먹고 웃는 과정은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고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한다. 이것이 슬로푸드 활동이 줄 수 있는 치유의 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함께하는 즐거움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 위에 놓여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음 모임에서는 일도, 기쁨도 조금 더 고르게 나누고 싶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떠올리며 나는 과거의 지혜가 미래의 밥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맛의 방주에 오른 앉은뱅이밀을 직접 만지고 먹는 일은 토종 곡물과 그 곡물을 지켜온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다. 오래된 음식과 식재료를 함께 만들고 나누는 경험은 세대와 사람을 이어주며, 때로는 잊고 있던 자신의 기억까지 불러낸다. 그 경험이 청년들의 밥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연화초의 첫날은 끝났지만 발효는 이제 시작이다. 하루 종일 종종걸음으로 움직인 진행팀에는 가을진미 전어회 한 접시를 대접하고 싶다. 오래된 미래는 거창한 선언보다,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고 마음을 나누는 작은 밥상에서 먼저 익어갈 것이다.
참고문헌
곽경자. 2026. 술도 생명이라던 사람, 창평 석탄주 명인을 만나다.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9.30).
전남 전통 막걸리와 식초, 담양에서부터 기록하다.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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