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지혜의 왕 솔로몬의 판결을 보면 甲과 乙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솔로몬 왕에게 어느 날 두 여인이 찾아와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퉜다. 왕은 먼저 영문을 들어 보고는 아이 생모를 알 수 없으니 아기를 똑같이 둘로 나눠가지라고 판결한다.
진짜 생모는 자기가 잘못했다며 울면서 아기를 포기한다. 아기를 포기한 생모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반면 만면에 미소를 띤 다른 여인은 지혜로운 왕을 믿는다며 왕의 뜻대로 하시라며 승리를 쟁취하는 듯했다. 그러나 지혜로운 솔로몬왕은 울고 있는 생모에게 아기를 안겨줬다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로 끝을 낸다. 두 여인 중 아이를 더 사랑하는 여인이 '을'이 된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경우도 속내를 살펴보면 결국 부모가 '을'이 된다.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의 내리사랑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 음란서생(감독 김대우, 2006)의 대본에서 왕(안내상 분)이 눈물을 흘리며 했던 말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아니더냐..." 그렇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만인지상의 임금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약자였고 '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전격전에 의해 1940년 6월, 프랑스는 항복한다. 영·불연합군은 순식간에 포위당하고 파리가 털릴 위기에 처하게 되자 프랑스는 항복하는데 그때까지도 프랑스군 주력은 마지노선에 있었다. 그러나 이걸 움직이면 독일군에게 반격이 가능할 수도 있었으나 정작은 파리가 파괴 되는 것이 프랑스는 두려웠던 것이다. 항복으로 파리를 지켰기에 오늘의 파리가 보존된 것이다. 더 사랑하는 편이 '을'이다.
우리나라는 요즘 기업들이 "슈퍼 '갑'과 '을'의 실태와 해결방안"이 이슈가 되다가 그대로 정치권력의 "여당과 청와대는 '갑'이고 야당이 '을'인 관계"로 넘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솔로몬 앞에선 두 여인이 품고자하는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가 진정한 '갑'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선거철마다 굽신거리며 국민의 종복, 머슴이 되겠다던 정치권력은 선거 프랭카드도 때기 전에 국민이 '갑'임을 망각하고, 청와대와 여당은 '갑'이 되고 야당은 '을'이 되어 권한을 위임한 국민을 '丙.臣(병신)'취급하는 못된 작태를 보이고 있다.
지난 대선 기간, 국정원이 야당후보 낙선을 위한 정치공작을 했고, 경찰 지휘부가 나서서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사실이 검찰의 수사결과를 통해 온 세상에 드러났다. 또한 새누리당이 정상회담 회의록을 대선 전에 불법 입수, 선거에 악용했다는 의혹과 비판여론이 확산되면서 국민의 실망과 분노가 촛불로 옮겨 붙자, 정부와 여당은 지난 7월 1일 '국정원 댓글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수용키로 한 후 지금까지도 국정조사는 시간끌기로 실종 시키고 있다.
더 가관인 것은 그도 모자라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故 김정일 전 위원장의 회담이 든 회의록 원본이 없다는 미증유의 사건 앞에 망측한 결론을 들고 乙丙(을병)이 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단다. '史草'(사초)가 없어졌다면 국기문란이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중대한 사태인데, 가만 보니 상전인 '갑'을 속이고 을병들이 살려면 그게 없어야 할 것 같아 저지르는 짓들을 누가 모를까.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이 죄다 자기편인줄 알지만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과 보수언론만 모르지 나머지는 다들 알고 있다.
여기저기서 국기를 문란 시키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는 공복인 '을병'들이 정작 '갑'의 의견은 커녕 '갑'을 겁박하고 안하무인격의 권력으로 언론을 장악해 주인인 '갑'을 속이려고 손바닥으로 '갑'의 눈을 가리는 파렴치가 자행되고 있음을 알만한 '갑'들은 다 알고 있다. 더 사랑한다면 생떼 그만 부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갑'의 민심을 바로 읽으라 권고한다.
"예루살렘에 예수께서 입성하셨을 때에 권력자들은 예수를 환영하는 이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저들이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라고 하시며, 권력자들의 폭력적인 부당성을 지적하셨다". 그리고는 예수께서 당대 미증유의 땅에 오시어 스스로 감당해 낼 수 없었던 풍전등화와 같은 유대인의 민족사를 마주하며 스스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 이유가 '더 사랑해서'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 이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성서 속에 드러난 그 날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너희가 소리치지 않으면 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 분야에 돌 같은 자가 소리치기로 의기를 모우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어린아이를 살리려고 하니 이미 저들이 '갑'이 돼있다. 이제 장성한 '갑'인 자녀와 엄마가 함께 '거짓 엄마'를 솔로몬의 궁궐 밖으로 내몰아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정치권도 여당은 '갑'이고 야당은 '을'인가? 지금 거짓 슈퍼 갑들이 도를 넘어서면서 종교인, 교수, 학생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며 시국선언을 하고 나섰다. 지금은 좌파니, 진보세력 운운하면서 단순 이념 논쟁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결국 수습할 수 없는 사태가 올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가. 정도를 넘어서고 임계점에 다다르면 그로인해 '을'과 '병'의 반란이 아니라 진정한 '갑'이 자리매김을 하게 될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켜야 한다. 지금 '갑'의 입장에서 상황을 살펴보면 비운동권 학생들과 믿었던 우파세력, 넥타이부대, 그리고 고교생들까지 촛불을 들 양으로 몸을 풀고 있음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편들어주는 언론이 보편성을 잃게 되면 어떤 결과를 맞게 될 것인지, 성난 개개인의 손에 든 1인 미디어는 이미 제도언론의 영향력에 다 달아 있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타산지석으로 삼길 바란다.
지금은 명상과 기도로 '가짜 엄마'와 맞설 때다. 여기서 인간을 더 사랑하는 하느님은 '을'이다. 기도란 '갑'인 하느님께 드리는 '을'의 호소가 아니라. '을'인 하느님께서 '갑'인 우리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 무엇을 구하고자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간곡히 원하시는 것'을 귀 기울여 고요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예수께서 '저들이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2천여 년의 시차를 넘어 오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솔로몬의 지혜로 살려온 민주주의라는 옥동자는 다시금 반 토막이 될 수 있음을 염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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