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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미덕일 때는 내가 '듣는 사람'이고자 할 때다. 어려움을 고백해오는 이의 말을, 내 마음 속 와글거림을, 자연이 계절 따라 변하면서 들려주는 노래를 '듣는 사람'이 되어 기꺼이 침묵할 때 침묵은 아름답다.
하지만, 대화를 하거나 의견을 나눌 때 침묵을 한다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있는 경우다.
말을 해봐야 내가 온전히 이해받지 못 할 거라는 예감, 나만의 다양하고 미묘한 감정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다른 표현이 침묵이다. 그러므로 침묵은 긍정이 아니다.
차라리 말 대신 행동으로, 극단적으로는 죽음이라는 행동으로 상대 의견에 저항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간혹 침묵을 암묵적 동의로 해석하는 일은 대단히 부조리하다.
지난 16일 영훈국제중학교의 교감이 교내에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는 2013년 입학 전형에서 특정 학생을 합격 또는 불합격시키기 위해 성적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조사 중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아들이 비경제적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성적 조작에 의한 입학이 아니냐는 의혹도 함께 받고 있었다.
국제중학교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한다는 애초의 취지보다는 성적 좋고 집안 좋은 자제들의 전유물이 되어 온갖 입시 부정이 난무할 것이라는 의심을 받아왔고 그 때문에 폐지론마저 돌던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직 교감의 자살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부랴부랴 서울교육청과 성북교육청은 이후 3일간의 휴교령과 함께 학생과 교직원에게 긴급 상담 치유를 지원한다고 나섰다.
나는 이러한 조치들이 문제 상황을 미리 해결하지 않다가 어리석은 후폭풍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의 극단적인 침묵 행위를 계기 삼아 잠재적인 극단적 침묵 행위자들을 골라내겠다는 위협으로 보일 정도다.
논란 속에 있는 특별한 어느 학교의 사건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오버랩 된 이들이 있으니 '한나'와 '미하엘'이다. 독일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대 교수였으며, 작가로 활동해 온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 '책 읽어주는 남자'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소설은 서른 여섯 살의 여자와 열다섯 살의 소년이 스물 한 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란 몹쓸 열병을 앓다가 여자의 자살로 그들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문제적 상황이 영원한 침묵이 되고 마는 내용이다.
한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말단 경비원이었지만 삼백여 명의 유태인을 죽게 만든 책임자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함께 재판을 받은 전범자들의 모함이었지만 한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글을 읽지 못해서 미하엘이 책 읽어주는 것을 그토록 좋아했던 한나는 자기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미하엘이 알까봐 극도로 두려워했다. 미하엘 역시 한나가 문맹이라는 것을 밝히면 누명을 벗고 낮은 형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가 없었는지, 한나가 목숨 걸고 감추고 싶었던 것을 지켜주고 싶었는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한나가 복역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미하엘이 책을 읽고 녹음하여 보내준 테이프를 들을 때. 그것을 들으면서 한나는 글을 깨우쳤다. 한나는 애초부터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글을 깨우친 후 더욱 성실한 사람이 되어 수감자들을 위해 열성적인 봉사를 하고 감형을 받기에 이른다. 다시 밝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미하엘을 만나고 자유로운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한나는 출소 하루 전 날 자살을 하고 만다.
진실은 투명하다. 한나는 자신이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문맹자라는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저 밥벌이 수단이었던 수용소 경비원이라는 직업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게 만든 비열한 일이었다는 죄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한나의 자살이 자존심을 지키면서 속죄를 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긴 침묵의 미덕 속으로 산화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 교감의 자살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비리가 있었는지 내 입으론 말하지 않겠다'가 아닐까? '나로선 최선책이었는데 비리라고 몬다면 말하지 않음으로써 내 입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아닐까? 많은 학부모들이 선망하는 학교의 책임자로서도 그렇고, 모범의 전형을 보여야하는 교육자로서도 그렇고, 그의 죽음은 사회적 위치를 부끄럽게 하는 도망이라 생각한다. 견디기 힘든 참으로 비겁한, 침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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