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옛 이야기 간직한 한강 섬
역사 속에 이름만 남은 섬: 잠실도, 부리도, 무동도, 난지도, 저자도
2011-03-04
이성용 기자 jck0869@hanmail.net
이성용 기자 jck0869@hanmail.net
100년 동안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 한강의 섬들은 고스란히 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다. 올 봄엔 살아있는 역사 현장인 한강 섬을 탐방해 보는 것은 어떨까?
현재의 잠실일대는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뽕나무가 가득한 섬이었다. 여기에는 부리도, 무동도라 불리는 섬들도 있었고, 심지어 현재 석촌호수 일대가 한강 본류였으며 지금의 한강은 지류에 불과했다.
1930년대 당시 잠실도를 형성했던 신천, 잠실 2개 마을의 면적은 약 200만평이었으며 약 100호 미만의 가구가 채소 등을 가꾸어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1970년대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공유수면 매립이 실시돼 강의 범람으로 일시적으로 생기는 신천강을 본류로 삼고, 송파강(기존 한강)을 메우면서, 현재의 잠실 일대로 변하게 된다.
이곳의 주된 소득원이었던 뽕나무는 매립공사 때 한 그루도 살아남지 못했고 상신제(桑神祭)를 올렸던 500년 넘은 뽕나무도 사라졌다고 하며, 기존 한강의 일부는 메우지 않아 후에 석촌 호수가 됐다.
이후 잠실대교 가설과 잠실구획정리사업 등 잠실개발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고, 잠실종합운동장에서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명실 공히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조선시대 서울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고 하며, 이후 뽕나무 등을 재배하며 사람들이 살아 1967년까지 62세대가 살면서 고기잡이와 조선, 뽕나무·약초(감초) 재배나 염소 방목 등을 했다.
1968년 여의도 개발시 한강의 흐름을 좋게 하고, 여의도 제방을 쌓는데 필요한 잡석 채취를 위해 섬을 폭파·해체했으며,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으로 이전하게 됐다. 밤섬 폭파에 따라 중심부가 집중적으로 파헤쳐져 윗밤섬과 아랫밤섬으로 나누어지고, 밤섬 대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강 퇴적물에 의해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 속의 철새도래지’로 거듭나며 자연 퇴적에 따라 면적도 매해 증가, 1999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지속 관리하게 된다.
섬이라 이름 붙은 뚝섬은 섬이 아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광진구 자양동과 구의동 일대에 위치한 뚝섬은 옛날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섬을 닮았다고 해 일컬어졌다.
특히 군사훈련장으로 쓰였던 뚝섬에 임금이 사냥을 나오면, 그 상징인 독기(纛旗 ; 소꼬리나 꿩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를 꽂았고, ‘독기를 꽂은 섬’이란 뜻에서 ‘독도(纛島)’라 불렀다.
뚝섬은 '살곶이벌'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칩거하던 조선 태조가 서울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태종이 뚝섬에서 맞았는데, 태조는 태종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는 고사에 연유된 것이다.
조선시대 여의도는 잉화도, 나의주라 불리며, 갈수기에는 밤섬과 백사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양과 염소를 기르는 목축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 영조 때에야 하나의 마을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 만들어졌고, 1922년에는 비행사 안창남이 한국인 최초로 여의도 상공에서 시험 비행해 일제강점하의 민족들에게 큰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다.
1970년대 여의도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국회와 아파트, 금융시설들이 들어서게 되고 서울과 한강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2009년 ‘한강 공공성 회복 선언’에 따라 전략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고, 2011년 지구단위계획이 수립, 명실상부한 동북아 글로벌 금융중심지로 또 한번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동률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운영부장은 “다가오는 봄, 따뜻한 햇살과 함께 한강변을 산책하며 각각의 섬에 깃든 그리고 그 흔적에 남아있는 역사의 기억을 되새겨본다면 한강의 소중함과 깊은 가치를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잠실일대는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뽕나무가 가득한 섬이었다. 여기에는 부리도, 무동도라 불리는 섬들도 있었고, 심지어 현재 석촌호수 일대가 한강 본류였으며 지금의 한강은 지류에 불과했다.
1930년대 당시 잠실도를 형성했던 신천, 잠실 2개 마을의 면적은 약 200만평이었으며 약 100호 미만의 가구가 채소 등을 가꾸어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1970년대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공유수면 매립이 실시돼 강의 범람으로 일시적으로 생기는 신천강을 본류로 삼고, 송파강(기존 한강)을 메우면서, 현재의 잠실 일대로 변하게 된다.
이곳의 주된 소득원이었던 뽕나무는 매립공사 때 한 그루도 살아남지 못했고 상신제(桑神祭)를 올렸던 500년 넘은 뽕나무도 사라졌다고 하며, 기존 한강의 일부는 메우지 않아 후에 석촌 호수가 됐다.
이후 잠실대교 가설과 잠실구획정리사업 등 잠실개발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고, 잠실종합운동장에서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명실 공히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조선시대 서울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고 하며, 이후 뽕나무 등을 재배하며 사람들이 살아 1967년까지 62세대가 살면서 고기잡이와 조선, 뽕나무·약초(감초) 재배나 염소 방목 등을 했다.
1968년 여의도 개발시 한강의 흐름을 좋게 하고, 여의도 제방을 쌓는데 필요한 잡석 채취를 위해 섬을 폭파·해체했으며,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으로 이전하게 됐다. 밤섬 폭파에 따라 중심부가 집중적으로 파헤쳐져 윗밤섬과 아랫밤섬으로 나누어지고, 밤섬 대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강 퇴적물에 의해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 속의 철새도래지’로 거듭나며 자연 퇴적에 따라 면적도 매해 증가, 1999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지속 관리하게 된다.
섬이라 이름 붙은 뚝섬은 섬이 아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광진구 자양동과 구의동 일대에 위치한 뚝섬은 옛날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섬을 닮았다고 해 일컬어졌다.
특히 군사훈련장으로 쓰였던 뚝섬에 임금이 사냥을 나오면, 그 상징인 독기(纛旗 ; 소꼬리나 꿩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를 꽂았고, ‘독기를 꽂은 섬’이란 뜻에서 ‘독도(纛島)’라 불렀다.
뚝섬은 '살곶이벌'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칩거하던 조선 태조가 서울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태종이 뚝섬에서 맞았는데, 태조는 태종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는 고사에 연유된 것이다.
조선시대 여의도는 잉화도, 나의주라 불리며, 갈수기에는 밤섬과 백사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양과 염소를 기르는 목축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 영조 때에야 하나의 마을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 만들어졌고, 1922년에는 비행사 안창남이 한국인 최초로 여의도 상공에서 시험 비행해 일제강점하의 민족들에게 큰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다.
1970년대 여의도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국회와 아파트, 금융시설들이 들어서게 되고 서울과 한강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2009년 ‘한강 공공성 회복 선언’에 따라 전략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고, 2011년 지구단위계획이 수립, 명실상부한 동북아 글로벌 금융중심지로 또 한번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동률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운영부장은 “다가오는 봄, 따뜻한 햇살과 함께 한강변을 산책하며 각각의 섬에 깃든 그리고 그 흔적에 남아있는 역사의 기억을 되새겨본다면 한강의 소중함과 깊은 가치를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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