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jnnews.co.kr@hanmail.net
[전남인터넷신문]'역사마을 1번지' 전남광주 고려인마을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공동 추진하는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 및 지원사업'의 스물일곱 번째 인물로 독립운동가 김정하(金鼎夏·1897~1938) 선생을 선정해 그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을 재조명한다고 20일 밝혔다.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난 김정하 선생은 연해주와 만주, 상하이, 모스크바를 무대로 활동하며 무장투쟁과 정보수집, 독립운동 조직 운영, 청년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김정하(金正夏), 김정하(金政夏), 이성범(李成範)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따르면, 김 선생은 1920년 9월 연해주 포조에서 폭탄 6개를 국내 함경북도 청진으로 반입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어 같은 해 11월부터는 일본군과 친일 세력의 동향을 수집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공채 모집에도 참여하는 등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연락망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1923년에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상해파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참가해 창조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고려혁명군 제3대 사령관을 맡아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으며, 단지동맹암살대 대장과 대한통의부 군정위원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 조직의 핵심 지도자로 활약했다.
1924년에는 간도지역 중학교 학생조직 별동선전대인 세우단 집행간부를 맡아 청년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대동회 모연대에서는 간도와 북선 지역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이어 1925년에는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적기단 극동청년공산당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세력 간 협력체계 구축에도 기여했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김 선생은 1929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모스크바 공산대학 조선민족부 교관으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에도 힘썼다.
하지만 그의 삶은 스탈린 정권의 고려인 탄압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1937년 소련 전역에서 고려인 강제이주와 대숙청이 시작되자 같은 해 8월 체포됐으며, 이듬해인 1938년 1월 18일 총살당했다. 일제에 맞서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는 해방을 보지 못한 채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정하 선생의 공훈을 인정해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묘소의 정확한 위치와 직계 후손에 대한 확인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광주 고려인마을과 고려신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의 후손과 관련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재조명하는 것은 물론, 역사 속에 묻힌 후손들을 찾아 지원하는 사업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고려인마을 관계자는 "김정하 선생은 폭탄 반입과 정보수집, 무장투쟁, 조직 운영, 청년교육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여러 분야에서 헌신한 지도자였다"며 "앞으로도 고려신문과 협력해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후손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잊혀진 역사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고려방송: 이부형 (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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