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jnnews.co.kr@hanmail.net
[전남인터넷신문]‘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공동으로 추진 중인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지원 사업」을 통해 스무 번째 인물인 김성무(1879~미상) 선생의 숭고한 삶과 독립운동 정신을 재조명하며 깊은 감동을 전하고 있다. 특히 김성무 선생은 현재까지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김성무 선생은 미주와 러시아 연해주, 만주를 오가며 국권 회복과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헌신한 대표적인 고려인 독립운동가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오랜 세월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인물이다.
김성무 선생은 1902년 9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박선겸·이대위·위영민·박영순·홍종술·김병모·전동삼 등과 함께 한인들의 상호 친목과 단결을 목적으로 한 ‘상항친목회’ 조직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당시 상항친목회는 단순한 친목단체를 넘어 해외 한인사회를 하나로 결집시키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후 1904년 하와이 이주 한인들의 미국 본토 이동으로 교민사회가 확대되자, 선생은 1905년 4월 5일 상항친목회를 확대 개편한 공립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공립협회는 동족상애와 환난상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하며 해외 한인사회 계몽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김성무 선생은 1905년 상항친목회 회장을 역임한 데 이어, 공립협회 상항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돼 1907년 1월까지 교민사회를 이끌며 항일운동 기반 구축에 앞장섰다.
1908년 공립협회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지역에 지회 설치를 결의하자, 김성무 선생은 이강과 함께 현지로 파견됐다. 선생은 러시아 수청과 치타 지역에 원동지회를 설립하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리에는 만주지회를 조직하며 해외 독립운동 네트워크 확대에 헌신했다.
같은 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선생은 이강·정재관과 함께 태동실업주식회사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사무원으로 임명됐다. 태동실업주식회사는 대한인국민회 창립 이후 독립군 기지 개척과 재러한인들의 실업 진흥을 위해 설립된 조직이었다.
이어 1910년 2월에는 중국 흑룡강성 밀산현 봉밀산자로 파견돼 독립운동 해외기지 건설을 위한 토지 매입과 농장 조성, 학교 설립 등에 힘을 쏟았다. 황무지와 다름없던 낯선 땅에서 조국 독립의 희망을 키우기 위해 한인 마을을 세우고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 기반 마련에 헌신한 것이다.
특히 같은 해 9월에는 안창호·이강·정재관·이갑·이종호·안정근 등과 함께 해외 한인들의 귀환과 무기 수송에 활용할 선박 구입을 논의하며 독립운동 지원체계 구축에도 나섰다.
이듬해인 1911년에는 안창호·신채호·유인석 등과 함께 봉밀산자에 한인 마을을 건설하고 신한민회를 조직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헌신했다. 이어 1912년 1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에서 국권 회복과 산업 진흥, 독립군 양성 등을 주제로 연설하며 동포사회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김성무 선생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낯선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타국을 떠돌며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민족교육, 독립군 지원에 자신의 삶을 바친 선생의 헌신은 오랜 세월 잊혀 있었지만, 그 숭고한 정신은 오늘날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성무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고려인마을 관계자는 “김성무 선생의 삶은 국권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고려인 선조들의 피어린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이라며 “이름 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전하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역사적 책임”이라고 말했다.
고려방송: 양나탈리아(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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