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忠烈祠) 제례(祭禮) 봉행(奉行)
2010-03-19
조안식 기자 jck0869@hanmail.net
조안식 기자 jck0869@hanmail.net
원주문화원(원장 강태연) 주관으로 국가와 향토수호를 위해 순절한 선열의 애국충정을 숭상하고, 제례봉행을 통해 원주 호국정신의 표상을 선양코자 “충렬사 제례 봉행”을 시민, 배향인물(원충갑, 김제갑, 원호) 후손 등 1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0년 3월 22일(월) 오전 11시 충렬사 사당(행구동 402-3)에서 거행하며,제례는 봉행식 선언, 전폐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망료례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충렬사(忠烈祠)는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의 합단적(哈丹賊) 침입과 1592년(조선 선조 25년)의 왜적(倭敵) 침략에 맞서 국권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1290년 원나라 반적(叛賊) 합단적[카단]이 고려의 동북 변방을 침입한 이후 1291년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 강원도)로 난입하여 영근[양평]을 점령하고 원주에 이르러 치악산 영원산성을 공격하자, 원주별초(原州別抄)에 소속되어 있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冲甲)은 결사대(決死隊) 중산(仲山),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 별장(別將) 강백송(康伯松), 원주 관리 원현(元玄)․원종수(元鍾秀), 유생(儒生) 안수정(安守貞) 등 다수의 원주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쳤다. 이로 부터 합단적은 예봉이 꺾여 여러 고을에서도 굳게 방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원충갑 등의 공로로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賦役)과 잡공(雜貢)이 3년 동안 면제되었다.
왜국의 조선 침략으로 촉발된 임진왜란은 유사 이래 최대의 국가적 위기상황이었다. 왜적이 영동지방을 짓밟고 남한강 상류를 따라 평창․ 영월․주천․신림을 거쳐 원주를 침입하자, 원주목사(原州牧使) 김제갑(金悌甲)은 병사와 고을 백성들을 모아 영원산성에서 결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영원산성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김제갑 원주목사는 항복할 것을 강요하는 왜적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끝내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작은아들 김시백(金時伯) 또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비보를 들은 부인 전주이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때는 1592년(조선 선조 25년) 8월 25일이었다.
김제갑 목사와 아들 그리고 부인은 충성(忠誠)과 효도(孝道)와 정렬(貞烈)로써 순절(殉節)하여 충․효․열의 표상이 되었다.
이에 앞서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 원호(元豪)는 1592년 5월 여주 신륵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패주하는 적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여 서울로 향하던 왜적의 진로를 차단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1592년 8월 왜적에 의해 철원․평강․김화 등이 유린당하자, 병사를 이끌고 김화에 이르러 분전하였으나 왜적의 형세를 당할 수 없어 왜적에게 굴복되기 전에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1669년(조선 현종 10년) 원주 하동리(下洞里)에 14칸으로 건립된 충렬사는 원주 유생들이 상소하여 1670년(조선 현종 11년) 윤2월 7일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되었고,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 충숙공(忠肅公) 원충갑(元冲甲)․원주목사(原州牧使)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여주목사(驪州牧使) 원호(元豪) 등 3위를 배향하였다.
1871년(조선 고종 8년)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해 헐려 없어진 이후 복원되지 못하다가 원주원씨 운곡대종회에서 건립부지를 희사하고 강원도와 원주시가 공동으로 2008년에 준공하고 매년 원주시민의 정성을 모아 매년 음력 2월 7일(1670년 사액된 날)에 제향하고 있다.
충렬사(忠烈祠)는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의 합단적(哈丹賊) 침입과 1592년(조선 선조 25년)의 왜적(倭敵) 침략에 맞서 국권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1290년 원나라 반적(叛賊) 합단적[카단]이 고려의 동북 변방을 침입한 이후 1291년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 강원도)로 난입하여 영근[양평]을 점령하고 원주에 이르러 치악산 영원산성을 공격하자, 원주별초(原州別抄)에 소속되어 있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冲甲)은 결사대(決死隊) 중산(仲山),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 별장(別將) 강백송(康伯松), 원주 관리 원현(元玄)․원종수(元鍾秀), 유생(儒生) 안수정(安守貞) 등 다수의 원주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쳤다. 이로 부터 합단적은 예봉이 꺾여 여러 고을에서도 굳게 방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원충갑 등의 공로로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賦役)과 잡공(雜貢)이 3년 동안 면제되었다.
왜국의 조선 침략으로 촉발된 임진왜란은 유사 이래 최대의 국가적 위기상황이었다. 왜적이 영동지방을 짓밟고 남한강 상류를 따라 평창․ 영월․주천․신림을 거쳐 원주를 침입하자, 원주목사(原州牧使) 김제갑(金悌甲)은 병사와 고을 백성들을 모아 영원산성에서 결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영원산성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김제갑 원주목사는 항복할 것을 강요하는 왜적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끝내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작은아들 김시백(金時伯) 또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비보를 들은 부인 전주이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때는 1592년(조선 선조 25년) 8월 25일이었다.
김제갑 목사와 아들 그리고 부인은 충성(忠誠)과 효도(孝道)와 정렬(貞烈)로써 순절(殉節)하여 충․효․열의 표상이 되었다.
이에 앞서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 원호(元豪)는 1592년 5월 여주 신륵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패주하는 적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여 서울로 향하던 왜적의 진로를 차단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1592년 8월 왜적에 의해 철원․평강․김화 등이 유린당하자, 병사를 이끌고 김화에 이르러 분전하였으나 왜적의 형세를 당할 수 없어 왜적에게 굴복되기 전에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1669년(조선 현종 10년) 원주 하동리(下洞里)에 14칸으로 건립된 충렬사는 원주 유생들이 상소하여 1670년(조선 현종 11년) 윤2월 7일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되었고,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 충숙공(忠肅公) 원충갑(元冲甲)․원주목사(原州牧使)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여주목사(驪州牧使) 원호(元豪) 등 3위를 배향하였다.
1871년(조선 고종 8년)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해 헐려 없어진 이후 복원되지 못하다가 원주원씨 운곡대종회에서 건립부지를 희사하고 강원도와 원주시가 공동으로 2008년에 준공하고 매년 원주시민의 정성을 모아 매년 음력 2월 7일(1670년 사액된 날)에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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