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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불
  • 기사등록 2011-12-09 13: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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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대의 석탄기에는 지구의 표면에 화산폭발이 잦아 풍부한 이산화탄소와 고온현상으로 식물들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 무렵 번성하였던 열대의 식물들은 성장의 속도를 눈으로 가늠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울울창창한 식물들이 지표면 전체를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위와 같은 식물의 군락들은 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번성과 쇠락의 공전을 거듭하여 자신들의 삶의 잔해를 층층이 쌓아가면서 충만한 생명력을 마음껏 발산하였을 것이며, 식물성을 섭취하는 동물들 또한 먹이 감이 풍부하였던 관계로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체구로 삶을 영위하였을 것입니다.

물에서 생존하는 물고기들이 주로 아가미로 호흡하는 것과는 달리 고래는 포유동물이면서 지금도 폐 기능을 유지한 채 공기 중의 산소를 마시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육지에서 풍부한 식물들을 섭취하면서 생존해 가는 동안 점진적으로 변해가는 지구의 환경변화에 맞추어 바다 생활에 적응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당시 거대한 불덩어리로 표피만이 굳은 채 둥그런 형상을 유지하던 지구는 수시로 내부의 열과 가스를 밖으로 배출하려는 폭발과 함께 화산재를 허공에 퍼뜨리면서 번성하였던 식물들을 뒤덮어 말살시키기도 하고, 화산재 위에서 역경을 딛고 자라난 울창한 식물들을 또다시 뒤덮는 작용을 되풀이 하는 동안 현재의 지구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나긴 세월이 흘러간 이후 땅속에 묻혔던 식물들은 덩어리를 이루어 탄화작용을 하면서, 오늘날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는 화석연료의 근본인 원유가 되었으며, 이보다 빨리 탄화를 서둘렀던 개체들은 석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땅속에서 길고도 긴 세월동안 영원의 잠에 취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석탄은, 어느 날 광부가 난폭하게 들이대는 착암기와 곡괭이의 수모를 견디고 기계장치의 굉음에 몸을 맡겨, 과거에 자신이 누리던 지상에 되돌아 스스로의 존재를 일구는데 필수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태양빛을 마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까마득한 날들의 정령이 은연중 스며들은 고체는 인간이 개발한 기계 속으로 떨어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참하게 부서져 가루로 변하였다가 코크스와 약간의 점결제를 첨가하여 틀에 넣어진 다음, 엄청난 순간의 압력을 견뎌내고 또 다른 존재로 거듭하여 태어나는데 지나온 날들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온몸이 시커먼 상태로 무게 3.5킬로그램에 발산하는 열량이 약 4,400여 킬로칼로리로 연소가 잘 되도록 공기가 통하는 구멍을 19개 또는 22개 정도를 뚫어 놓았던 가정용 구공탄이야 말로 가난하였던 시절의 한겨울을 보내는 서민들의 절대적인 반려자였던 샘입니다.

늦가을 스산한 바람이 불어 닥치면 아궁이를 정리하여 구공탄에 불을 붙이고 지리한 겨울이 다 지나고 늦은 봄과 함께 초여름이 찾아 올 무렵까지는 우리의 어머니와 누나들은 연탄불과의 씨름을 멈추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보리대와 짚으로 땔감을 삼던 시절에 지금은 몇 푼이 안 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연탄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나머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연기를 둘러쓰면서도 아까워서 쓰지 못하였던 집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한번 살린 불씨는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음식물을 조리하는 일 뿐만 아니라, 추운 계절의 세수와 빨래는 물론 목욕까지 할 수 있는 따뜻한 물을 쉬지 않고 조달해주느라고 새 연탄으로 갈아주는 시간이 일정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수시로 새 연탄으로 교환을 하였을 것이지만, 알뜰하게 연탄의 열량을 모두 챙기려는 사람들은 단잠을 자던 꼭두새벽에도 추위를 털어내며 연탄불을 교체 하는 고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무렵 전 국민의 대다수가 서민이면서 유난히도 춥고 지루하였던 겨울을 보내는 데에 필수적으로 고마운 존재였던 연탄에 얽힌 사연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추억을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밤이 깊어가는 시간에 연탄불에 데워 부엌에서 목욕을 하는 누나들의 물소리는 미처 크지도 않은 사나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개구쟁이 친구들로 하여금 허술한 부엌문을 기웃거리게도 하였으며, 연탄의 가운데 구멍에 새끼줄을 끼워 매일 같이 한 장 또는 두 장을 들고 골목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집집마다 바깥쪽을 향하여 내뿜는 연탄가스는 냄새가 고약하기도 하였지만 예고도 없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신문과 방송의 화두는 연탄가스에 질식하여 사망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였으며, 결혼을 앞 둔 청춘 남녀의 사망과 일가족 전체가 가스에 질식하여 숨졌다는 소식은 우리의 가슴을 무척 아프게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서민들은 연탄을 떠나 겨울을 지낸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어 달리 대책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하던 시절의 삶과 죽음은 항상 우리 곁의 골목에 머물면서 우울한 추억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따뜻한 느낌의 기억들이 한층 더 많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연탄불만 있으면 간단없이 쏟아지는 눈바람 속에서도 걱정이 없었으며, 밤과 고구마 오징어 땅콩, 오래된 떡 쪼가리와 자반고등어를 뜨끈뜨끈하게 구워 간식으로 먹기도 하고, 반찬이나 술안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어물이나 과일 전을 펼쳐 놓은 상인들의 옆에는 어김없이 연탄난로가 있었으며, 온갖 음식들이 뒤섞여 김을 불어내면서 부글부글 끓는 김치찌개는 오가는 사람들의 한 모금 감로수였던 것입니다.

번데기와 다슬기와 어묵국물을 데워 고단한 나그네의 목을 축이는 포장마차는 정겨운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는데 한가운데에는 연탄난로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수제비와 팥죽과 국밥을 팔던 오일 장터와 국수를 감칠맛 나게 말아주던 장 고개에도 연탄난로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납부금과 학교 육성회비를 제외한 용돈의 명목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학생 시절 어머님께 책값에다 추가로 보태어 청구하였던 가슴 떨리는 동전으로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어울려 들렀던 장고개의 국수는 20원 이었습니다.

콧물을 훌쩍이며 뜨거운 국수 가락을 호호 불어가며 마시던 친구들은 지금은 소식이 요원하지만 따뜻한 추억만큼은 내 가슴의 언저리에 잔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중고시절 드나들던 학교의 운동장에는 무슨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무연탄과도 같은 시커먼 흙이 무한정 깔려있었는데, 비가 오면 질척거리는 것을 막아주는 고마운 존재였지만, 축구공을 따라 뛰어 다니다 넘어지면 여지없이 옷에다 숯검정을 묻히곤 하였습니다.

그 무렵 까만 운동장을 누비던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서울, 인천, 광주, 부산등 대 도시 뿐만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지금은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얼굴에 연탄재를 발라 손잡이가 검정색으로 채색이 된 손수레를 앞에서 끌던 아저씨와 뒤에서 밀던 아주머니며 집게로 연탄을 들어 나르던 형들의 땀에 젖은 얼굴들은 지금도 눈앞에 아른 거립니다.

아침에 일어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말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였는데, 간밤에 연탄가스를 마셔 골치가 아프다는 사람들은 장독을 뒤져 신 김치와 얼음이 덜 녹은 동치미 국물을 마시곤 하였습니다.

골목길을 돌아서다 보면 곳곳에 타고 남은 연탄재를 쌓아놓은 장면이 정겹게 느껴지는데 아예 연탄재에 흙을 발라 울타리를 삼은 집들이 간간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옆집의 아저씨는 술을 너무나 좋아 하신데다 덩치가 황소만 하였는데, 취기가 오르면 아버님이 정성스레 쌓아 놓은 연탄재 울타리를 박치기 한방으로 넘어뜨리고는 다시 쌓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창고에 줄을 지어 쌓인 연탄들을 보면 괜히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던 시절, 연탄 배달은 마음만 다잡으면 취업이 되고 생활의 보장이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강원도의 태백을 비롯하여 무연탄을 생산하는 탄광에는 실업자의 최후 보루가 되었으며, 깊고 깊은 산골짝에 한때는 십만 명을 넘어서는 도시를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탄광의 폐쇄로 그 시절의 세 사람 중 한사람만이 도시를 어렵게 지켜가고 있습니다.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트럭에 몸을 싣고 생전 처음으로 38선을 한참 지나 도착한 전곡의 사단 사령부 정문에서 1977년 12월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밤 11시에서 12경까지 보초근무를 서던 중, 몇 미터 앞에 있던 상점의 연탄불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우던 호빵은 평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50여분 동안 침을 삼키면서 지켜보기만 하다, 초소 안에서 졸고 있는 기관병의 눈을 피해 먹고 싶은 나머지 보초근무 수칙을 어기고 자신도 모르게 몇 발짝 옮기는 순간, 야속한 개가 짖어대는 바람에 실패하였던 호빵이 지금도 모질게 그립습니다.

1982년도 겨울철 나주 세지면의 민가에 은신처로 마련한 방이 팔자소관인지는 몰라도 방바닥이 엉덩이 만큼의 자리만을 제하고 통 불길이 미치지 못하였는데, 마지막 동전마저 한산도 담배를 사서 피우고 만 그날 밤, 공교롭게도 연탄불이 꺼져 버린 것입니다.

번개탄을 구하기 위하여 버스길도 막혀버린 삭풍이 울어대는 들판을 가로 질러 친구가 사는 동네를 향해 약 20여리 길을 내리 달려 새벽잠에 취해 있는 친구를 깨우기 까지는 했지만, 아침부터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을 끝내 뱉지 못하고 되돌아 와서 추위로 고초를 겪었던 연탄 화덕이 지금도 내내 잊혀 지지 않습니다.

1987년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 새벽 2시경 잠 못 이루는 정열의 발동에 의하여 무작정 찾아 나선 목포 유달산의 조각공원을 향하는 급경사의 빙판인 골목길에서 타고 남은 연탄재의 도움을 받아 고생을 하여 공원에 도착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햐얀 눈을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짐진 조각 작품들을 깊은 밤 혼자서 찬찬히 감상하는 영광을 누리고는, 발아래 모래알처럼 펼쳐진 지붕들 밑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연들을 꿈꾸어보는 순간에도 연탄불은 활활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지막의 몸 한 구석까지 아낌없이 태워버리면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해 준 연탄의 덕목에 대해 고마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모든 사람에게 연탄재와 같은 사랑을 실천한 적이 있었느냐고 준엄하게 묻고 있습니다.

새 연탄은 무게가 상당하였음에도 타버리고 남은 재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었는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가볍기만 하였습니다.

따뜻할 때의 연탄과는 달리 사람들은 타버리고 남은 연탄재를 무의식적으로 천시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연탄재는 타고 남은 자신을 잘게 부수어 빙판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의 아낌없는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두 개 이상의 연탄이 겹쳐서야 타면서 먼저 것이 떠나면 새 것이 대신하여 빈자리를 메워 가는 의미는 인간 세상의 세대교체나 반려의 상념을 깨우쳐 주기도 합니다.

미련 없이 타버린 두 개의 개체는 아낌없는 운우의 정을 끊지 못하고 아무런 접착제의 도움도 없이 강력하게 몸을 부둥켜 안아 떨어질 줄 모르고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곤 하였는데, 칼이나 집게로 어쩔 수 없이 갈라 놓으려하면 이기지 못하고 깨져버리는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토록 기나긴 세월의 의미와 우여곡절을 거쳐 단 몇 시간 동안의 연소 과정을 거쳐 뜨거운 기운을 마음껏 발산하고 날개처럼 가벼운 몸으로 남아있는 연탄재를 때로는 등신불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학창시절 국어책을 통하여 처음으로 접하게 된 등신불의 실체를 느껴보고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보시된 만적선사의 등신불이 현세에 계신다는 사실만으로 뜨거운 격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의 몸과 마음 또한 자연의 일부가 변화한 존재로 여겨지면서, 연탄재의 의미를 등신불의 의미로 승화시키는 정신의 세계가 참으로 깊고도 오묘한 것으로 비추어지고, 마음으로 느끼는 무형의 공간자체가 경건한 등신불의 성스런 자리가 되고, 등신불의 존재를 감지하는 예지력 또한 지고지순한 등신불의 실체가 아닌지 지긋하게 되새겨 보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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