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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삼한(三韓)시대(2)
  • 기사등록 2011-08-17 15: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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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3세 단군 가륵께서 기해 원년(기원전 2182년) 5월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시의 가르침과 다스림의 도를 물으시자,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하여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 말씀드렸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아비 되려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 하고자 하는 자는 곧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자는 곧 스승답게 하며, 아들과 신하와 제자가 되려는 자 모두 아들과 신하와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입니다.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으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해와 달과 별, 쇠와 나무와 물과 불과 흙은 사람의 머리에 뭉쳐 깊고 묘한 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게 되는 것이었다.

경자 2년(기원전 2181년)에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려 참 글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아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

신축 3년에 신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에 열양(황하강의 북쪽)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흑룡강 부근으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는데,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는 곧 그 땅에 봉하니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기원전 2175년)에 강거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지백특(티벳)에서 정벌하였다.

무신 10년에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음이 바뀌어 牛首국(소머리, 우수리 지역 추정)이 되었는데, 후손 중에 협야노 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일본열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하였다.

계미 45년(기원전 2138년)에 태자 오사구가 4대 단군에 올랐다.

갑신 원년(기원전 2137년)에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 한(몽고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해 10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신선 불사의 영초인 산삼을 얻었다.

무자 5년에는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만들고 가을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 갔으며, 10월에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널리 알렸다.

경인 7년에 조선소를 살수(난하 추정)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기원전 2119년)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 식달에게 명하여 람, 진, 변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자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기원전 2100년)에 양가(오가의 하나)의 구을이 5세 단군에 즉위 하였다.

임술 원년(기원전 2099년)에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어 제를 올리게 하였다.

계해 2년 5월에 메뚜기 떼가 일어 그 피해가 막심하였는데, 삼신에게 고하여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 4년에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기사 8년에 인도 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정축 16년(기원전 2084년)에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단을 봉축하시고 한화(무궁화 추정)를 심고, 7월에는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으로 붕어하시자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의 달문이 뭇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무인 원년(기원전 2083년)에 6세 단군에 올라 대통을 계승 하였다.
임자 35년(기원전 2049년)에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였다.

마침내 뭇 왕들과 한국의 오훈과, 신시의 오사를 가지고 끝까지 지켜 나가기로 약속을 세우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사면 제도), 사형제도와 연좌제를 폐지하였으며,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 결과를 공개하고, 서로 위하고 화합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참으로 어진정치를 처음으로 펼쳤다.

신지 발리는 삼신께 올리는 옛 제사에서의 서원의 글이자 신지의 직책을 지낸 사람들의 극적인 숨은 이야기를 적은 ‘신지비사‘를 지었다.

갑인 원년(기원전 2047년)에 양가인 한율이 7세 단군에 오르고, 무신원년(기원전 1993년)에 8세 단군 우서한이 즉위하였는데, 이십분의 일을 부담하는 세제를 확립하여 있는 곳과, 부족한 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다음해 기유 2년에 벼 한포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맺혀 대풍을 이루었다.

신해 4년에 단제께서 옷을 바꾸어 입고 국경을 나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는 크게 관제를 고쳤다.

갑인 7년(기원전 1987년)에 세발 달린 까마귀(삼족오)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날개의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

병진 원년(기원전 1985년)에 태자인 아술이 9세 단군에 즉위하여 어진 정치를 펼쳐 모든 백성을 감화시켜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는데, 두 개의 태양이 마치 넓은 울타리 모양으로 비추었다.

정사 2년에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침범하니 단제께서는 상춘으로 몸을 피하여 보전하신 후, 우지와 우율 등에 명하여 토벌하여 척살 하도록 하시고는 3년 뒤에야 되돌아 오셨다.

신묘 원년 (기원전 1950년) 우가인 노을이 추대 받아 10세 단군에 즉위하였는데, 처음으로 가축이 아닌 큰 동물 우리를 지어 길렀다.(동물원의 시효)

을미 5년에 궁문 밖에 신원목(탄원을 표하는 나무)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니 멀리 사는 사람들까지 크게 기뻐하였다.

병오 16년(기원전 1935년)에 천하(바이칼 호)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윷판과 같은 것이었으며, 발해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13섬이나 나왔다.

을축 35년(기원전 1916년)에 처음으로 천문대를 설치하였다.

경인 원년(기원전 1891년)에 태자인 도해가 11세 단군에 즉위하였는데,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에 소도를 설치토록 하고, 박달나무를 둘러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천왕의 상을 모셔 이를 웅상이라 하였다.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시고, 한웅의 모습을 받들었는데, 머리위에는 광채가 번쩍여 마치 큰 해와 같았으며, 박달나무 밑 한화(무궁화 추정)의 위에 앉아 계시니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 앉아있는 것 같았다.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고 사흘 동안 재계하시고, 이레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듯 하였다.

정사 28년(기원전 1864년)에 사방의 진귀한 물건들을 모아 장소를 마련하여 전시하니 백성들이 다투어 헌납하여 산처럼 쌓였다.(최초의 박물관)

을해 46년(기원전 1854년)에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고, 3월에 산의 남쪽에서 삼신을 제사하고, 술잔을 돌려가며 여러 재주들을 관람하신 후, 누각에 올라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며, 오가를 돌아보고 살생을 금하는 등 어진정치를 강론하니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술 57년(기원전 1835년)에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슬퍼하며 부모의 상을 당한 듯하고 삼년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 소리가 끊겼다.

정해 원년(기원전 1834년)에 우가의 아한이 부족의 추대를 받아 12세 단군에 즉위하였는데, 다음해 무자 2년에 외뿔 가진 짐승이 송하강 북쪽에 나타났으며,

8월 단제께서 두루 순시하였는데, 구려하(발해 멸망후 지금의 요하로 개명)남쪽에 이르러 역대제왕의 이름을 새긴 순수관경의 비를 세웠다.(금석문의 효시)

을묘 29년(기원전 1806년)에 청아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기묘 원년(기원전 1782년)에 우가의 흘달이 추대를 받아 13세 단군에 올랐다.

갑오 16년(기원전 1767년)에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니,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어 스스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이해 겨울에 은나라가 하나라를 정벌하니 걸 왕이 구원을 청하여 읍차인 말량으로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군사를 되돌렸는데,

이번에는 하나라 걸 왕이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로 길을 막으니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구이 중 견이 추정)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섬서성)의 빈(주나라 조상인 공유가 세운 나라), 기(주나라의 옛 도읍)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서경의 상서 중 탕서 전의 제1편에 ‘탕왕에게 이윤은 걸 왕에게 공물을 바치지 말고 동정을 엿보라는 계책을 일러 이에 따르자, 걸 왕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상을 정벌하려 함으로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알리고 용서를 빌었는데,

다음해 또다시 공물을 바치지 않자 걸 왕은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구이의 군사가 응하지 않아, 탕왕이 대군을 동원하여 산서성 안읍현 명조에서 대군이 격돌하여 걸 왕을 격파하였다’고 적었다. 걸 왕이나 탕왕에게는 단군조선의 삼한에 속하는 구이의 군사를 너무나도 두려워 한 흔적이 역력하다.)

무술 20년(기원전 1763년)에 소도를 많이 설치하여 천지 화를 심고 미혼의 자제들을 모아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도록 하여 이를 국자랑이라 부르고, 이들은 머리에 천지 화를 꽂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무진 50년(기원전 1733년)에 별들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기묘 61년(기원전 1722년)에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이 밥도 먹지 않고,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모든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방생하고 해를 넘겨 장사를 지냈다.

경진 원년(기원전 1721년)에 우가인 고불이 오가의 추대를 받아 14세 단군에 즉위하였다. (계속)

이암의 단군세기 발췌, 서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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