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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의 푸념, 다윗과 골리앗
  • 기사등록 2011-06-02 14: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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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요즈음 신문지상을 살펴보면 재벌가의 딸들이 제빵 업에 뛰어들어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재미있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년에 방영된 “제빵 왕 김 탁구”라는 드라마가 한참 동안 시청자의 눈과 귀를 붙잡고 시간만 되면 다투어 텔레비전 앞으로 몰려들어 무관의 제왕이 제빵의 세계를 섭렵하는 정말로 드라마틱한 장면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거기에 나오는 빵은 직접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빵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서양 사람들과 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이미 우리 전통의 상당부분이 상실된 지금 우리에게도 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동안 대기업에서는 주로 제조업 등에 종사하면서 소시민들이 영위하는 삶의 영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침범하지를 않았는데, 정작 대기업의 딸들이 제빵 사업에 투자를 하여 그나마 박빙의 승부를 겨룬다면 알게 모르게 힘없는 서민들의 밥그릇을 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대자본을 투자하여 대량으로 생산하는 원가절감의 시스템으로 시장주의에 충실하여 박리다매를 통하여 이익을 창출한다는 경제 논리는 정당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투자하여 무차별적인 이익을 남기게 되면 우선은 좋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하여 정작 서민들 삶의 터전이 붕괴 되다 보면, 비록 값싸고 맛있는 빵을 만들어 공급하는 소수로부터 구매자인 다수에게는 빵을 살 돈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목을 가리지 않는 대자본의 투자로 서민들의 소자본이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자본의 변형된 흐름이 빵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하나의 예를 들어서 표현하였을 뿐 입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으로 대표되는 시장주의 원리와 미국의 자유방임주의는 자본의 대규모 집약으로 인하여 중소 상공인의 기반을 무너뜨리며, 빈부격차에 의한 새로운 문제점으로 국가경제를 어렵게 하면서 국채를 발행하여 채무의 이자를 변제하는 악순환으로 급기야는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시켰던 것입니다.

거대한 경제구조였던 미국사회가 흔들린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세계경제의 기반 자체가 역삼각형으로 매우 위태롭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진정한 채권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일반 국민들은 자꾸만 옥죄어 오는 누군가의 압박에 시달리고, 세계의 모든 국가들도 커져가는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궁여지책으로 연명하고 있는데, 정작 누군가 도미노의 열쇠를 어느 순간 건드리게 되면 한꺼번에 대책 없이 넘어지는 비운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신용과 화폐 체계가 무너진 사회가 은연중 도래한다면 이 세상 모두에게 돌아오는 쓰라린 고통이 될 것입니다.

부의 편중에 의한 경제구조의 불균형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마치 사람의 피가 통하지 않아 뇌출혈을 일으킨 나머지, 이상 없이 튼튼한 팔다리와 오장 육보가 있다 하여도 같이 쓰러지게 될 뿐 아니라, 평소에 건전하게 단련된 신체가 아니었기에 회복 또한 장담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의 시골 읍, 면단위 마을들을 살펴보면 저마다 품목(쌀, 소금, 옷감, 채소, 생선, 이불, 기름, 연탄, 농기계 등)과 분야(이발, 중화요리, 건축, 대장간 등)가 각기 달라 금전의 흐름이 단위별로 돌고 돌아가면서 크지는 않았지만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자금이 파생적으로 효용을 창출하는 생산적이고 건전한 경제구조로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웃이 자신들의 경제기반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서로가 보이지 않는 생존의 고리로 이중, 삼중으로 엮여 있었을 뿐 아니라 생활비를 보태주고 농사일등 어려운 때에는 공동작업도 해주는 삶의 동반자로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제 축적된 자본들은 효율적으로 재투자하여 첨단 기술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세계 최고의 신기술로 넓은 세계의 부를 벌어 이를 국내로 끌고 들어와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밥그릇 다툼을 벌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골 노인들이 봄이면 산에 가서 고사리 등 나물을 채취하여 약간의 소득을 보는데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고사리 값보다 더 되는 기름을 태워가면서 산과 들을 누비는 것은 무언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자본이 심지어 순대, 피자, 통닭, 각종 식재료, 자판기, 주유소, 변형된 슈퍼 등을 포함한 약 200여개 정도 되는 분야의 사업에 무차별적으로 투자를 한다는데, 정작 소시민들은 무엇을 하여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으로 이는 마치 백 만석의 지주가 소작인의 전답에 떨어진 이삭을 욕심내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농사도 망쳐버리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대자본이 서민들의 영역인 유통업 중 생필품과 채소 등 재래시장이나 동네 슈퍼에서 취급하는 품목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현실을 살펴보면 정겨운 동네문화는 찾아볼 수가 없을뿐더러, 지방에 있는 대형마트에 뿌려진 현금은 본점이 있는 서울로 순식간에 이동해 버려 궁핍의 악순환이 일어나 이웃과는 도움 될 것도 별로 없이 다툴 일만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오로지 개발에만 매달리며 재벌이 형성되기 전에는 빈약한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때로는 자본이 흩어져 있는 것보다는 뭉쳐 있으므로 하여 경쟁력을 갖추고, 조직적이고 국가적인 대응이 필요도 하였을 것입니다.

외국에서 들여온 차관이라는 형태의 자본은 그대로 대기업의 손으로 들어가 무역업의 기반이 되어 한때는 요긴하게 쓰여 경제개발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개발이라는 미명과 대의라는 이유로 서민들의 주장과 이익은 마치 헌신짝처럼 버림을 당하면서 힘든 굴절의 아픔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초창기 경제개발의 주역들은 거의 13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일하고 휴일도 반납한 채 노력하여 오늘날 누리는 부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주역과 연출자가 따로 있었던 것을 정작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되는 순간 연출자가 모든 관람료를 몽땅 챙겨버린 것과 같은 결과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토록 피나는 노력의 과실들은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는지 흔적이 보이지 않더니 국가발전의 선도적인 요긴한 곳에 건전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서민의 얇은 주머니에서 오히려 동전을 빼앗는 수단으로 변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사회주의적인 발상으로 부의 평균적인 배분의 의미가 아닌, 복지와 사회적인 안전망의 의미로 다 같이 잘살아 가는 건전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대학생들의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올라서고 가계부채의 수치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수입이 줄어들어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뜻인데, 대자본이 자신들의 이익만 노리는 일은 의당 자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학자금 대출의 이자가 무려 7.3퍼센트에 이르고 그 이용자수가 약 15만 3천명에 이르고, 대학생 신용불량자가 1만 명을 넘어선다고 하니 학업을 마치고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도 전에 불량한 채무자의 오명을 쓰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육제도를 살펴보면 사학에도 국가의 상당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등록금등은 소비자물가지수의 2-3배에 달하도록 계속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학업에 열중하여야 할 시간에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등록금 투쟁에 나서게 되니 정말 보이지 않는 이중의 고통인 것입니다.

대자본이 소자본의 설자리를 계속하여 빼앗아 갈수록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자리는 하늘의 별따기가 될 것이고,
그나마 얻은 일자리의 임금은 상투적으로 연체되기도 하니 정말 희망차게 인생을 준비할 새로운 세대에게 시련만 남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이미 성서 사무엘 7장에 등장하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대자본은 중소기업에 대하여 힘든 상처를 입히고서도 이제는 서민들의 생활 터전인 골목을 넘보고 있으니 참으로 기업이윤의 목적이 어디인지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여 초창기에는 그동안 애쓴 직원에게 공로를 위로하거나 사회의 어두운 곳에 일부를 환원하거나 기술개발에 다시 투자하는 건전한 방향으로 지출이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가 대자본은 끝없는 이윤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잉여금을 적립하면서 기술개발을 위한 투자를 미루고, 젊은 나이에 약간의 효율만 떨어지면 냉정하게 차디찬 거리로 몰아내는 효율의 극대화라는 족쇄를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친 창의적인 일꾼들은 얼마든지 그 역량을 발휘할만한 나이에 사회의 방랑자로 전락하고 있으니 차라리 봉급은 적더라도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원하는 현상을 유발하여 결과적으로는 유능한 기술을 사장시키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극적인 이윤 창출이라는 대기업의 욕심이 용수철을 누르는 것과 같아서 급기야 견디지 못하는 대다수 서민들이 정돈된 질서를 깨뜨려 대자본이 활개 치는 무대 자체를 말살시키려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인이 모인 상아탑에서조차 물리적인 힘의 표출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흘려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려운 곳의 신음소리를 외면하고, 서민의 삶이 안정되지 못하면서 고통이 가중되는 사회가 숫자로만 환산하여 삶의 질을 높게 평가하는 경제구조가 결코 건전한 형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자본이 부리는 마술로 소자본의 무능을 비웃고 게을러서 실패한다는 논리로 멸시하는 일이 나타난다면 이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연옥이나 다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애써 모은 자본을 무작정 서민들에게 그냥 돌려 달라는 취지는 아니고 다만 서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면서까지 감행되는 무차별적인 이윤의 창출은 도의상 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들의 부모들께서는 시집보낼 딸이 있으면 시장에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사다가 조그만 막을 짓고 허드레의 음식물로 정성껏 키워 자녀의 결혼일자에 맞추어 동네잔치를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기업화 되어 위와 같은 잔치들이 멈추어버린 현실에도 만족을 모르는 대자본들이 끊임없이 이윤을 향해 돌진하고, 그 잉여금을 통장에 적립하면서 자신들의 투자(소비)는 틀어막은 채 서민들의 소비를 촉진하는 행사를 멈추지 않으니 자연스레 가계 부채가 늘어날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에 걸치는 삼베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지금이라도 불우한 이웃에게 숨통을 열어주는 배려가 절실할 것입니다.

무지한 힘이 넘치는 골리앗의 큰칼은 다윗의 돌멩이에 의하여 한치의 힘도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여 끝없이 타오르는 욕망에 의하여 자타가 무너지는 불행은 사전에 막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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