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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고 물을 건너
  • 기사등록 2011-05-19 13: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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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매년 특별한 소식도 없이 찾아오는 봄이건만 금번 신묘 년의 아지랑이는 다른 봄날보다도 은연중 부산하게 다가오는 날들로 기억이 됩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삶을 꾸려가던 직장생활의 장소가 무려 40여년간 희로애락을 뒤로하고 새로운 장소의 새 건물로 바뀌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4월이 지나가는 마지막 주 일요일에는 혼자서 배낭을 메고, 그동안 마음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무작정 올라 가슴에 맺히던 이슬과 같은 번뇌들을 하염없이 털어내던 옥녀봉과 양을 산을 오르다가 내리고, 내렸다가 다시 오르기를 거듭하면서, 산을 끼고 이어진 주변의 동네들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걸어 하루해를 거의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옥암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그동안 정들었던 산을 자주 보지 못할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오르내렸던 길과는 약간 다른 길을 따라 새로이 걸어보니 뜻밖에 그동안 전혀 보지 못하였던 장면이 펼쳐지는데, 비석도 넘어지고 산딸기만이 엉클어진데다 무심한 잡풀이 우거진 묘소들이 줄지어 자리한 길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부지런하게 다니던 길이 실처럼 이어지는 외딴곳을 걷게 된 것입니다.

순간 이 세상에는 산자와 죽은 자가 종이 한 장 만큼 공간의 차이를 두고 공존하여 살아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것입니다.

후손들이 정성껏 준비한 비석에는 생전의 성씨와 이름이 새겨지고 더불어 이면에는 자녀들과 며느리뿐만 아니라 사위들의 이름까지 새겨진 것을 보고 망자와 산자와의 사이에는 영원토록 끊어지지 않는 인연의 끈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모든 현상을 냉철한 이론으로 규명하는 과학적인 사고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한계를 고집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꽃피운 종교에서 주장하는 내세와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는 상호간에 충돌하면서도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네 말은 옳고 내 말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열반경에 등장하는 불교우화 중에는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손으로 만져보도록 하고 그 생김새에 대하여 답하도록 하였다는데, 적게는 여섯 명, 많으면 열 명의 장님들이 각기 다른 답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장님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지전능하신 신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그에 대하여 진정한 신의 모습을 답하라고 하였다면, 열사람의 장님과 같은 발언을 하였을 것입니다.

열사람이 표현하는 코끼리의 모습과 열사람이 표현하는 신의 모습은 모두 합하여 그리면 거의 비슷한 답에 이를 것으로 보여 집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는 수도 없는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 같이 물질인 육체가 소멸하고 난 다음의 내세에 대하여 주장하면서도 축복 받은 내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제 각각의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는 길이 그만큼 다른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서울을 가는데도 차량과 선박, 기차, 항공기뿐만 아니라 갖가지의 교통수단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표지점인 서울에 이르는 수단이 되는 것은 맞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는 굳이 배척할 이유도 없거니와 내가 주장하는 길만이 만고의 진리라고 우길 필요도 없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스스로의 처지에 맞는 길을 찾아 진리의 등불을 찾는 구도자의 신심을 고이 간직한 채 끊임없이 스스로의 마음을 닦아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불교성전 서두에 등장하는 “일체유심조”는 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려있다는 뜻으로 불가의 핵심을 이루는 처음과 끝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질인 육신은 아마도 마음이 피어나는 방향으로 갈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이 짓는 것으로 하여, 만 가지 종교가 우주의 한 현상으로 표현하였던 천국과 지옥에 이르는 길을 제 각각 가슴속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대한 허공중에 티끌같이 작은 한 점들로 자리한 인간이 펼친 삶의 편린들도 물론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우리 존재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뜻있는 것으로 하려면, 평생 동안 인간의 도리를 밝히려고 전념하신 고승들께서 어두운 밤에 찬연히 빛나는 별과 같이 뿌려둔 주옥같은 법어와 일화를 통하여 높고도 깊은 뜻을 만분의 일이라도 짐작하여 깨우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승들께서 펼치신 법어들은 한 마디로 부처님의 말씀과 다름이 없을 것으로 느껴지므로 달리 구별하지 않고 소개하고자 합니다.

“인생 한 백년이/ 나그네 같거늘/ 어디에 묻힐는지 아득하여라”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나라”

“햇빛 속에 몸을 바르게 세우면/ 그림자도 바르게 서고/ 몸을 구부리면/ 그림자도 따라 구부러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부처인지도 모르고 중생이라 한다/ 다만 자신이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자기가 원래 부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착 없는 ‘나’가 비로소 ‘참 나’인데/ 마음 생멸은 문득 어디서 오는가/ 내 안에서 찾아야 체득할 수 있네.”

“두견새가 밤을 새워서/ 울다가 목이 메면/ 다시 넘어오는 피를/ 머금고 또 운다/ 그런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라./ 그때 비로소 모든 것을 이룰 수가 있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좋은 날이다./ 이렇게 좋은 날도 스스로/ 만드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말은 언중유골이다./ 첫 번째 말은 종자가 되고/ 두 번째 말은 싹이 트고/ 세 번째 말은 열매를 스스로 거둔다./ 말은 이처럼 무섭다”

“깨달으면 부처도 조사도 소용이 없으며/ 팔만대장경도 다 소용이 없다/ 오직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부처이면 부처같이 행하고/ 스님이면 스님 같이 행하고/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 몸과 이 우주의 허공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이것이 삶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의 영혼은 육체의 관속에 들어가고/ 관 속의 육체는 허물어지고/ 영혼은 더 자유로워진다./ 육체가 완전 주검이 되었을 때/ 영혼은 완전히 자유로워짐을 알라”

“귀를 기울이면 어린아이들도/ 부처님 말씀을 하고 있다./ 내 부모 형제가 부처님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겠는가”

“자신이 부처라고 생각하면/ 저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부처이다.”

“가나오나 서거나 앉거나/ 연꽃이 피듯이/ 머무는 그곳이 극락이다./ 극락과 지옥은 / 모두 우리가 가진/ 마음으로 통한다”

“행복은 바랄수록 멀어지고/ 집착할수록 불행해진다./ 행복은 구해지는게 아니라/ 저절로 자기를 향해 찾아오는 것이다.”

“생과 사는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 이를 아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네”

“결코 사람은 부처를 볼 수 없다/ 왜냐 하면 부처는/ 바로 마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종이 그 속을 비운 이유는/ 멀리까지 소리를 울리기 위함이고/ 거울이 세상 모습을 평등하게 담을 수 있는 것은/ 그 겉이 맑기 때문입니다./ 강물이 아래로만 흐르는 것은/ 넓은 바다가 되기 위함이고/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은/ 형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가질 때는 지성껏 기도를 해야 한다./ 술과 담배를 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 반드시 아이를 가질 때는/ 자신의 조상이 지켜주는 집에서 가져야만 한다./ 다른 장소에서 아이를 가지게 되면/ 잘못된 영혼이 올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는 아이만의 업이 있고 아이만의 영혼이 있음을 알라.”

“많이 놓아 버리면 성인이요/ 많이 들려는 자는 중생이 아닌가/ 풀 끝에 걸린 하늘/ 이슬로 떨어지고/ 그렇지 않는 하늘이 이렇듯 보이는구나.”

“수행하고 포교하여/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드는 일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불사이다”

“자기 자신을 구하는 동시에/ 남을 구원하는 진리./ 자기 자신이 깨닫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을 다 깨닫게 하는 진리가/ 거룩한 가르침임을 알라”

이외에도 고승들의 법어를 소개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도 모자라 행동으로 중생들에게 깊은 뜻을 가르치신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찰을 찾아가다보면 생리현상을 다스려야 하는데 소변보는 장소를 일컬어 “휴급소” 큰일을 보는 장소를 “해우소”라는 푯말을 부치게 된 것은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경봉스님께서 최초에 사용하신 것이 지금은 일반에게 대중화 되었다고 합니다.

경허스님께서는 이따금 “단청불사”를 한다는 이유로 시주를 받아 주막에서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단청불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시주 받은 돈으로 술값을 계산하는 스승에게 따지는 제자를 향해 스님은 자신의 얼굴이 붉게 변한 것은 단청이 잘된 것이며, 이제야 눈을 뜨게 되었다고 칭찬을 하였답니다.

이후에도 경허 스님의 단청불사는 계속 되었는데,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스님을 향하여 마을 사람들이 혀를 차는 것을 둘러보고는 “어허 내가 보니 여기 이놈들은 모두 내 아들놈 들 뿐이네.”라고 하여 몰매를 맞고는 어느 집의 골방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불이야 불”이라고 외쳐 온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서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이곳에서 불이 나서 활활 타는데 어디 한번 꺼보시오”라고 외친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서산에서 한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그 집의 머슴으로 들어가서 남몰래 사랑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스님이 약 50여세 정도 되었을 무렵 한 여인이 조실로 있던 방문을 두드리자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공양도 겹상으로 받아 가면서 몇날 동안을 같이 지내자 절 사람들이 쑥덕거리면서 좋지 않은 소문이 돌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다 못한 시봉인 만공 스님이 스승의 방에 들었을 때는 여인이 조실스님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어 있었고, 며칠 뒤 만공스님이 “도량이 어지러워질까 두려우니 그 여인을 절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어떨른지요”라고 아뢰자 이를 엿들은 여인이 떠날 차비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뜻밖에도 문둥병 환자였던 것입니다.

고승의 자비심이 입증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육척 장신의 경허와 제자인 만공 스님은 체력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두 스님이 탁발을 나가 시주받은 곡식을 메고 다니는데 자꾸만 만공스님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마을에 이르러 경허스님이 갑자기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을 향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으며 입을 쪽 맞추고는 도망을 가므로 마을 사람들을 피하여 만공스님도 도망을 하였는데, 추격권에서 벗어나자 경허 스님이 바랑은 무겁지 않더냐고 물으며 “모든 것은 마음의 장난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의상대사와 행자승간에 있었던 일화와 어느 정도 비슷한 가르침인 것으로 보여 집니다.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은 모두 결혼을 한 뒤에 출가를 하였으며, 슬하에 딸을 두었고 출생지가 똑같이 진주라고 합니다.

성철 스님은 평생 동안 한 벌의 옷으로 살았는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스스로 빨래를 하였다고 합니다.

성철 스님이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수도 하는 중에 속가의 어머니와 20대의 처와 어린 딸이 찾아 왔지만 끝내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 딸이 20세가 되는 해에 출가를 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도 나중에 출가를 하였으니 온가족이 불가에 귀의한 것입니다.

비구승들이 스님을 산중회의를 열어 주지로 모시려고 결정을 하였으나 거절하자니 율법에 어긋나고, 선승으로 공부에 방해 받고 싶지 않아 단 하루만 주지 방에서 자고는 벽에다 “走之(달아날 주, 갈지)”라고 써 놓고 야반 도주를 하였다 합니다.

스님께서 1993. 11. 4일 입적 하셨는데 유품으로는 누더기 옷 한 벌, 낮은 책상, 몽당연필, 검은 고무신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청담 스님께서는 여섯 살 된 딸과 처자를 두고 출가를 하였으며 전국 각지를 떠돌았는데, 결국에는 만주까지 다니다가 상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 진주불교회의 초청을 받아 연화사에서 법문을 하게 되었다 합니다.

법회를 마치고 절문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붙잡고 다짜고짜 속가로 가기를 원하여 거리에서 더 이상 다툼을 벌일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따라가게 되었는데 “내 다른 소리는 안 하마. 니 아들 하나만 낳아 놓고 가라”고 하자 간곡하게 거절을 하는 스님에게 “그래 니 놈은 너를 위해서 에미도 마누라도 버리고, 어린 새끼도 버려서 절집에 갔더니 부처님이 뭐라고 하더냐, 중생들 가슴을 이렇게 찢어놓고 니 하나만 부처되면 된다고 하더냐, 내 유언이라 생각하고 아들 하나 만들어라”고 하니 도저히 거역할 길이 없던 스님은 어쩔 수 없는 파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스님은 아침 첫 닭이 울기 전에 속가를 맨발로 빠져나온 뒤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후 10년간 맨발의 수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스님이 그토록 연민의 정에 못이겨 파계하면서 까지 낳은 아이는 속가에 남은 불행한 여인 3명에다 또다시 한명의 여인을 보태게 되었던 것입니다.

청담 스님이 도선사에 기거할 때 소문도 없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경호원도 없이 올라와 그나마 며칠간을 묵고 가겠다 하니 온 절간이 발칵 뒤집혔는데, 스님께서는 법당에 들러 절을 하도록 하고 골방을 깨끗이 치우고 음식은 마음을 베어 정성을 다하여 접대 하도록 하였다 합니다.

일주일간의 산사생활을 통하여 스님께서는 육영수 여사에게 '대덕화‘라는 법명과 함께 보살계를 내리고, 여사께서는 드디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합니다.

이런 인연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청담 스님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하였는데, 훈장을 달면서 “큰스님 가사에다 이런 걸 달아도 괜찮겠습니까”고 묻자 스님께서는 “이게 모두 다 꿈속의 일. 달거나 아니 달거나 무슨 상관이 있겠소이까”라고 대답을 하자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믿던 스님의 속가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하면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개종을 하겠다고 맹세를 하라”고 애원하는 것을 냉정하게 뿌리쳤는데, 두 눈을 부릅뜬 아버님의 호통소리를 뒤로 하고 끝내 엇갈린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만공 스님이 머물던 수덕사에서 100일간의 안거를 마치고 곡성에 있던 태안사를 향하던 23세의 전강 스님은 길을 걷던 중 깨달음을 얻어 춤을 추면서 깊은 밤 태안사 법당 앞에서 허리춤을 열고 천하가 다 들리도록 오줌을 누었던 것입니다.

밤중에 그것도 법당 앞에다 방뇨하는 미친 중을 향하여 대갈일성을 하는 스님에게 “허허 이런 어두운 놈을 보았나. 세상 천하 두두 물물이 다 부처인데, 부처 없는 곳이 어디 있느냐, 천지사방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어디에다 오줌을 누겠느냐”고 하자 쫒아가던 스님은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만 것입니다.

역대 경전과 선사에 의하면 오줌을 누는 곳마다 부처가 있는 셈이니 법당 앞이라 해서 구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이세상의 모든 사물에 부처의 성향이 있다는 진리를 실제로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고승 마조스님과 제자인 남전과의 사이에 땅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입야타 불입야타(들어가도 후려치고 안 들어가도 후려친다)”의 일화와 마찬가지로 만공 스님이 전강에게 땅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똑같은 주문을 하자 발로 동그라미를 슬그머니 지워 핵심은 동그라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후 전강은 경봉스님에게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같은 주문을 하였는데, 마침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동그라미를 향해 날려버리는 태도를 취했다고 하는데 결국 위와 똑같은 뜻이 될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스님께서는 나주 금성산 다보사의 주지로 있었는데, 사찰의 범종을 전쟁 물자로 공출하도록 했음에도 이들의 요구에 일체 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루는 나무를 하러 갔던 행자가 급히 달려오면서 "경찰서장이 스님을 잡으러 온답니다. 범종을 공출하라고 했는데도 안했다고 직접 온다고 합니다“고 하자 태연히 법당에서 기도를 하는 척 하다 화가 잔뜩난 나주경찰서장에게 ”범종은 아침저녁으로 기도할 때 꼭 필요한 것이라 안 된다“고 거절을 하자 ”무슨 기도를 하는데 안 되느냐“고 반문하므로 ”요즘 천황폐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 기도를 드리려면 반드시 범종이 필요하다“고 둘러대어 범종을 지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 암을 향하여 30대 후반의 사나이가 등에는 엿판을 메고 하얀 눈썹을 한 채 석두 스님을 찾는 기이한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석두 스님이 괴상한 행장을 한 중년의 사나이를 보고 신기하여 “유점사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나요”라고 묻자 잠간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벌떡 일어나 큰 걸음으로 방안을 한 바퀴 돌아서서 “이렇게 왔습니다”고 대답을 하자 놀란 스님은 “유점사에 가기 전에는 무엇을 하였소”라고 묻자 “팔도강산을 엿장수로 떠돌았습니다”고 대답을 하였는데, “무슨 일로 찾아 왔는고” 묻자 “스님 밑에서 머리를 깍고 불도를 공부하고 싶습니다”고 대답하여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는가”고 물으니 “서른 여덟입니다”고 대답을 하자 석두 스님은 절 앞에 있는 다락논으로 사나이를 데려가서는 손에서 바늘을 빼어들어 순간적으로 논에 바늘을 던져버리고는 “자네가 바늘을 찾아오면 내 머리를 깍아 줌세”라고 한 다음 방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사나이가 바지를 걷고 논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있다가 해는 지고 그로부터 사흘이 꼬박 지나간 다음 사나이는 문제의 바늘을 찾아 석두스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스님은 사나이에게 ‘학눌’이라는 법명을 내리고 출가를 시켰으니 훗날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효봉 스님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해 동안거에 정진하는 스님은 화두에 빠져 공양시간이 되어도 누가 옆에서 일러주지 않으면 죽비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몰입을 하였는데, 방선을 하고 일어서는 스님의 엉덩이에 방석이 그대로 붙어있어 떼어내면서 보니 엉덩이가 짓물러 터져 피고름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께서 법기 암 뒤편에 토굴을 짓고 모든 문을 폐쇄하고 수행에 들어갔는데, 겨울이 닥치면서 길이 끊어지기도 하고 전날에 넣어주었던 공양을 손도 대지 않을 정도로 몰두를 하면서 약 1년 6개월의 정진이 있은 후 여름날의 장마 비가 내리다가 멈춘 날 무문관의 벽을 허물고 목숨을 걸었던 수행의 결과 출가한 지 꼭 삼년이 되는 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스님이 출가한 후 칠년이 되던 해 유점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평양에서 같이 판사 생활을 하던 와타나베라는 사람을 운명적으로 만나게됨으로써 스님의 전직이 판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엿장수 스님에서 절구통 수좌로 또다시 판사 스님으로 하나의 별명이 추가된 것입니다.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던 같은 동족인 피고인에게 당시 일본 형법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내려야 했던 ‘이찬형“ 판사의 고충이 얼마나 컸으면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출가를 하게 되었는지 새삼스럽게 민족의 아픈 과거가 다시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금강산 부근 온정리 과수원에 자리 잡은 선방인 ‘여여원’에서 좌선을 하던 절구통 스님이 마당을 지나는 한 쌍의 젊은 남녀를 보고 갑자기 뒤로 돌아 앉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는데, 사실은 스님이 판사시절 중학교에 다니던 속가의 큰아들이 장성하여 결혼하고 신혼여행 중 참배를 하러 왔던 것입니다.

이후로는 스님께서 입적하기 며칠 전에 밀양 표충사에서 큰아들의 손자를 잠간 만난 적이 있을 뿐 속가의 인연을 전혀 만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나중에 미륵산 도솔 암에 선방을 마련하였는데, 스님을 출가시킨 스승인 석두 스님이 육이오 전쟁 중 환속하여 아들 하나를 둔 채로 다시 절로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실수를 하였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고 스승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며 은사를 깍듯이 모셨다고 합니다.

송광사에서 부터 상좌를 받기 시작하여 이발사 출신의 구산 스님과 통영 미륵도 용화사에 있을 때 법명 일초스님(시인 고은)을 상좌로 받아 들였습니다.

미래사 옆 토굴에서 일초와 함께 좌선에 들어갔는데, 대중들이 급하게 토굴을 짓는 바람에 방구들이 소리를 내고 벌레가 들어오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효봉 스님께서 뒷간을 다녀온 뒤 선방에 들면서 실수로 방구들이 삐거덕 소리를 내자 일초스님이 선경에 들었다가 깨어짐으로 인하여 토굴 뒤편에 있던 도끼로 방구들을 파헤치며 “스님 부처가 되면 뭐 합니까” “부처가 되면 뭐 하냐구요”라고 묻자 “그래 맞다 부처가 되면 뭐 하겠노 그만두자 그만두고 놀자”고 외치자 일초스님은 잘못을 빌고 진흙으로 방구들을 메우고 다시 불을 피워 말렸다고 합니다.

최근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도 효봉 스님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라는 열반 송을 남기고 1996. 10월 보름 입적 하였습니다.

불가에 명성을 얻은 고승들께서는 중생들을 제도하는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영원히 변함이 없을 금과옥조의 법문들을 후세에 유전 하였으며, 깨달음의 경지에서 뿜어내는 오도송들은 산 넘고 물을 건너는 여정을 통하여, 무상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길이 빛나는 귀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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