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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노을
  • 기사등록 2011-04-27 15: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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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태양은 매일 떠오릅니다. 흐린 날이나 궂은 날에는 우리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스스로 떠오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제 각각 뜨거나 지는 곳이 다르겠지만, 동쪽 하늘을 뚫고 일어나 서쪽 하늘 수평선이나 지평선 아래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무릇 새로이 태어나거나 소멸하는 데는 진통이 따르듯이 일출의 순간이 오기 전 잠시 동안 숨이 멎을 듯한 정적과 함께 어둠을 밀어내는 여명이 온 세상에 스멀스멀 깔리면 하늘이 찢어지는 산고의 아픔처럼 시뻘건 노을이 온통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데, 온갖 형상의 조화를 부리다가 참지 못하고 세상을 깨뜨리는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급기야는 수평선을 찢고 떠오르고야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구촌에 살아가는 생명의 근원이 엄숙하게 떠오르며 비쳐주는 천변만화의 빛의 향연을 보고 자신도 모르는 환희에 취하여 괴성을 지르고 환호하며, 장엄한 실체를 향하는 경외의 마음에 고개 숙여 절을 하고 자연의 순환 앞에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색깔에 따른 파장의 길이로 인하여 벌어지는 아침에 일어나는 빛의 조화는 정말로 힘과 신선함과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데 누구든지 그 감격을 대하다 보면 삶의 또 다른 활력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명에 노을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새기고, 노을에는 석양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새벽과 석양, 여명과 땅거미가 있으며, 노을은 아침과 저녁 두 개의 의미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노을일지라도 아침에 펼쳐지는 장관은 무언가 생동감이 느껴지고, 호방하고 희망적인 반면, 저녁에 펼쳐지는 노을은 무언가 비장함과 아쉽고 허무한 고독이 저변에 깔려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태양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주간에는 인류의 역사의 밝은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할 것이고, 태양이 퇴장한 밤에는 어두운 역사의 일부가 이루어졌을 것이나 주간과 야간의 틈새에서는 아침이나 저녁에 일어나는 노을처럼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혼이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실로 예술은 화려하고 웅장하기도 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연약해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내강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수천 년에 걸친 중국의 문명 중에서도 그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펼쳐졌던 당나라는 농경민족인 한족을 피지배 계급으로 하고 우리민족의 한 갈래로 퍼졌던 선비족의 핏줄을 타고난 지도세력에 의하여 건국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한족이 주류를 이루는 중원과 변방의 이민족 간에는 쉴 새 없는 투쟁이 있었지만 다민족의 문화가 한곳에 모여 제 각각의 특징과 장점을 살려 그야말로 문화와 예술이 만발하는 황금기를 맞이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경에서 비롯되는 고시대의 문필들로 부터 대를 이어 끊이지 않고 내려오던 문맥들이 드디어 이백과 두보라는 2대 산맥을 형성하면서 전무후무한 광대한 시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이백은 측전 무후의 장안 원년(701년)에 변방의 서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4-5세 때 촉의 면주 창명 현에 이주하여 25-6세 까지 살아가면서 무역을 통하여 쌓아 놓은 부친의 재산과 재능을 겸비하여 어려서부터 권력에 이어지는 상당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백이 시구에 능하고 재능이 탁월하였다 할지라도 사실은 중앙정부의 고관이 되는 것이 목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시험을 치러 당당하게 합격하거나 고관의 추천에 의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두 가지의 방법 중 첫 번째는 이미 신분상의 한계에 막혀 있었고, 두 번째 방법도 또한 탐탁하지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왕실에서 유행하였던 도가 사상의 융성에 의지하여 황실과 교류하는 길이 있었는데 궁여지책으로 20살이 되기 전 수년간을 입산하여 ‘동암자’라는 도사 밑에서 도를 닦기도 하면서 산중에서 천 마리의 새들을 길들여 손바닥에서 먹이를 먹였다고 합니다.

시인이 청운의 꿈을 품고 장강을 배로 내려가다가 호북의 강릉에서 발길을 멈추어 당의 조정에서 명산인 형산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근방에 있던 도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사마승정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너는 선풍도골이 있다”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크게 고무되어 자신을 대붕(장자에 나오는 등의 길이가 천리나 되는가상의 새)에 비유하고 사마승정을 희유조(등허리의 조그만 공터의 지름이 1만9천리나 된다는 새)에 비유하여 두 큰새가 서로를 알아 준다는 내용의 “대붕부”를 쓰게 됩니다.

사마승정과 헤어진 시인은 남조의 300년 수도인 금릉과 양주를 오가며 수년 동안에 아버지가 물려주신 30만금의 재물을 호탕하게 뿌리며 그야말로 꿈같은 세월을 보냈으나 스스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이백은 아무도 알아주는 자가 없는 허전함을 달래면서 고향의 친구에게 “공업은 이룩되지 않고/ 세월은 바삐 지나 가누나/ 계획은 모두가 틀어지고/ 병은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데/ (중략) 나그네 길 쓰라림이 한 몸에 모이고/ 가을의 적막이 몸에 스며드네.”라는 쓸쓸한 내용의 시를 적어 보냅니다.

30세 전후에 호북의 안륙에서 명문인 허씨 문중의 규수를 아내로 맞아 첫번째 결혼을 하는데 밤낮 술에 취하여 방탕하는 동안에 “아내에게 드림”이라는 시를 비롯한 몇 편을 지었는데, 고향을 떠나 나이만 먹어가는 초조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안주의 차관으로 ‘배’씨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자신에 대한 온갖 자랑거리와 재능을 보이기 위한 내용을 만리장성처럼 쓰고 배씨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도 적어 자신을 천거해 달라는 간절한 사연을 적어 놓고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큰새는 비좁은 지상세계를 버리고 하늘로 나는 법인데 어찌 이런 곳에서 우물우물 넋두리를 하고 있을 손가’ 라고 마지막을 장식하니 관리가 되어 자신의 뜻을 펼치고는 싶지만, 원색적인 아첨을 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여 실패한 인생을 살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의식의 저변에 아침노을의 구름을 먹고 소나무 그늘에 쉬고 학을 타거나 용을 부리고 하늘에 올라가 장차 신선이 되는 것이었지만, 현세에서의 꿈은 제왕의 정치를 계획하고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여 천자를 도우며,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주변을 평화롭게 만드는 충성과 효도의 의무를 달성하는 이중구도의 완벽한 꿈을 이루는 것으로, 어차피 인간의 일로 하여 실현하기에는 벅찬 안타까운 장벽에 부딪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채 스스럼없이 토해내는 거침없는 시어들이 이후 1200여 년 동안이나 수백만의 사람들이 애송하도록 만든 것은 그만큼 꾸밈이 없이 당당하게 피력하는 마력이 숨겨져 있었던 때문으로 보여 집니다.

“공업이 이루어지면 옷을 툭툭 털어 작별하고/ 선도 근방에서 한가로이 사는 것이다.” “원컨대 주군을 돕고/ 공업을 이루면 본디의 숲속으로 돌아가자” 라는 등의 시구들은 이미 신선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면서도 현실의 참여를 염원하고 있으니 스스로의 딜레마이자 우리들 모든 인간생활의 모순으로,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가 근원적인 갈증을 풀지 못하고 가슴 조여 애달픈 마음을 토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초들의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한 동병상련의 아픔을 여과 없이 신선하게 대변을 해주니 어느 누가 싫다고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어딘가에서 어둠을 뚫고 들리는 피리소리./ 춘풍으로 흩어져 낙양 거리에 가득 차니/ 이 밤 곡 중의 절류곡일세./ 사람이 어찌 일어나지 않으랴, 동산의 정 때문이리니. ”

“금향현의 범 장관에게 드리는 시”에서 “저는 희한한 보옥을 가졌는데/ 오랫동안 더러운 진흙에 파묻혀 있어/ 세상 사람들은 이를 깔보고/ 시시한 돌멩이라 하지요/ 깨끗이 닦아 바치고 싶지만 길이 없으니”라고 적어 자신과 범 장관을 동시에 칭찬하고 있습니다.

“고풍의 제 26수”에서 “파아란 연꽃이 잔잔한 연못에서 자라고/ 아침 햇살에 아름답고 선명하게 비추누나./ 가을꽃은 푸른 수면에 고개 내밀고/ 겹치는 잎사귀에 안개가 어른거리네./ 화려한 모습이 아무리 뛰어나도 덧 없네/ 좋은 향기를 전하는 이 없으니.”

“객중행”에서는 “난릉의 미주는 울금초의 향기/ 옥잔에 따르면 호박의 빛이어라/ 주인께서 흠뻑 취하게 해준다면/ 대체 어디가 타향이라는 것일까” 라고 적고 있습니다.

천보 원년(742년)에 이백과 친분이 있었던 오 균이 현종 황제의 부름을 받아 한림원에 들어갔는데 수년이 흘러간 뒤 사회정세가 어수선 해지자 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황제에게 아뢰어 재빨리 자신의 몸을 보전하면서 이백을 천거하였는지 황제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드디어 뜻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 시선은 “남릉에서 아이들과 헤어져 도읍에 올라가다” “부름을 받아 아내와 작별하다”등의 시를 후세에 남기게 됩니다.

이백이 천자를 알현한 날 현종은 수레에서 내려 친히 그를 맞이하였고, 식탁에 앉히고서 몸소 탕을 따라 주는 정중한 대접을 하였다는데, 당사자로서는 감격하고 의기가 솟아오르는 일이었지만 벼슬을 원하는 속내와는 달리 도사나 은사로 대우하려는 현종의 생각에 두사람 사이에는 이미 어긋난 가교가 놓여진 것이었습니다.

궁정시인으로서 “춘일행” “의춘원에서 천자를 모시며” “궁중 행락사 제8수” “청평조사 제3수”등을 지어 그 소임을 다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뜻과는 다른 궁중생활을 하는 동안 황제가 필요하여 찾으면 매번 술에 취한 상태로 불려 나갔다고 합니다.

3000명의 후궁에 미인 양귀비를 품에 안은 현종은 모란이 피는 어느날 술잔치를 벌이면서 악사 이 구년이 연주를 시작하려 하자 이를 제지하고 “지금 귀비가 명화와 서로 대하고 있다.

구곡구사라면 흥이 나지 않을 것이니 이백을 불러라”고 하니 신하들이 시내의 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된 시인을 찾아 어깨 밑을 부축하고 엉덩이를 밀면서 데리고 오자 현종이 웃으며 그에게 벼루와 붓을 주도록 하고, 술이 깨도록 얼굴에 찬물을 부었는데, 곧바로 주옥같은 시가 꼭지를 틀어놓은 물처럼 쏟아졌다고 합니다.

“구름은 옷자락을 띄우고 꽃은 아름다운 얼굴을 생각나게 하네/ 봄바람이 난간을 스치며 이슬을 한결 반짝이게 하누나./ 만일 군옥산두에서 보지 못한다면/ 반드시 요대 달 아래에서 만나리라.// 한 가지 농염은 이슬의 향기가 엉긴 듯/ 무산 운우는 애써 애를 끊누나./ 묻노라 한 궁의 누구를 닮았는가/ 어여쁜 비연이 새로 단장한 듯 하고// 명화와 경국이 서로를 기뻐하네/ 오래도록 얻으리라, 웃음 띠며 보는 군왕을./ 끝없는 한은 봄바람이 풀어주리/ 침향전 북쪽 난간을 의지하면”이라는 청평조사를 적었던 것입니다.

시인의 궁중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은 술에 취하여 환관의 우두머리인 “고역사”에게 자못 교만하게 자신의 신발을 벗겨 달라고 하는 만용에서부터 발단이 됩니다.

마지못해 신발을 벗겨준 고역사는 비록 불구자이긴 하였지만 배짱도 있고 현종의 잘못을 서슴지 않고 간언하면서도 안녹산의 난중에는 양귀비의 목을 비단으로 감아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였으며, 죄를 얻어 지방에 유배를 갔다가 은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황제가 붕어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통곡하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죽었다고 하니 기개가 장대한 사나이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비연은 옛날 어리석은 임금을 색욕에 빠뜨려 망국으로 이끈 여자인데 비와 견주는 것은 모욕이다. 무산의 신녀는 초나라의 양왕과 선왕에게도 잠자리를 내주었으니 수왕자의 비였던 양귀비를 비난하는 것이다’고 하여 침실외교로 이백을 참언하여 궁중에서 쫒아내 버린 것입니다.

영문을 모르는 시인은 억울하여 “송산에 돌아가는 배 도남을 배웅하며” “옥진공주 별관의 긴 장마, 위위사 장관 장에게 드림 제2수” ”행로난 제3수“ 등에 자신의 억울함을 적고 있습니다.

“옥호음”에서는 “천자는 내 눈썹의 아름다움을 사랑해 주건만, 어찌 하랴. 궁중의 질투하는 무리들을”이라고 쓴 것으로 시인은 비탄과 절망에 젖어 그 이유를 끝내 알지 못하면서 궁궐에서 추방이 되었던 것입니다.

“뜬 구름이 대궐을 뒤덮어/ 태양이 그 빛을 비추지 못하였네./ 숱한 먼지가 아름다운 구슬을 더럽히고,/ 잡초들이 한줄기 꽃을 망쳐 놓았구나.”

“깃털이 다 빠져 궁중을 물러나고/ 혼자 울며 시어사님에게 의탁하려 했지요./ 지껄이는 재주가 있어도 결국 버려지고,/ 다시 농서로 돌아 가렵니다.”

천보 3년 봄에 장안에서 추방된 시선이 황하로 내려가 낙양에서 11살 연하의 두보와 만나 풍류를 즐기다가 가을 무렵에는 고적과 함께 양송 땅에서 놀며 산동에서 도록을 전해 받고 이듬해 가을 노군에서 두보와 헤어진 후 병석에 눕게 됩니다.

지난날 기나긴 방랑 생활은 고난의 연속으로 언젠가는 벼슬길에 올라 실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추방된 신하로서 넓디넓은 중국을 가로질러 북에서 남으로 다시 북으로 걷는 끝없는 방랑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이미 정착하기에는 모든 것이 여의치 않고 이로부터는 글 솜씨 하나로 각 지역의 특성만을 바꾸는 틀에 짜인 찬양시로 기식을 구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처절하게 기백과 정력이 빛을 발하는 웅대한 시들이 쏟아지고, “양원음” “명고의 노래” “ 잠장군을 배웅하다” “ 노군의 요사에서 두명부 박화가 서경으로 돌아감을 배웅하다” “꿈에 천모산에서 놀다, 유별.” “서악운대의 노래” “단구자를 배웅하다” “ - 이숙운을 전별하다” “보게나, 황하의 물은 천상에서 왔도다./ 분류하여 바다에 이르러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네. (중략)의 ”장진주“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선은 안사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촉에 든 현종의 명령을 받든 영왕에게 초빙되자 뛸 듯이 기뻐하며, “영왕이 정월에 동쪽으로 출병을 하니/ 천자가 용호기를 나누어 주었네” “우레 같은 북소리는 무창을 진동하며/ 구름 같은 깃발은 심양을 지나네” “산과 바다가 움직이고 기우니 오랑캐 꺽이고 말았네/ 그대여 떠오르는 해와 같은 제왕을 보라”는 내용의 진군가로 보이는 “영왕 동순가”를 지었습니다.

위와 같은 대가로 시인은 나중에 옥고를 치르면서 송약사라는 귀인을 만나 옥살이를 면하고 야랑지방으로 귀양을 떠나가게 됩니다.

건원 2년에 은사를 받아 2년 이상이나 걸려 상원 원년에 심양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또다시 2년간의 방랑길에 올라 “추포가 제16수” “왕륜에게 드림” “선성의 술 빚는 기수를 애도하노라” “고숙계” “임종가”등을 남기고 보응 원년 (762년) 11월에 당도현의 이양빙의 집에서 향년 62세로 세상을 하직한 것입니다.

시선은 마지막을 장식하면서도 “대붕은 날아 팔방에 위력을 떨치고/ 중천에 힘이 다했건만 구할 길 없구나/ 여풍은 만세를 지르건만/ 부상에 놀아 소맷자락은 가지에 걸렸네./ 뒷사람이 이것을 전해줄까/ 중니는 없어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가.”의 임종가를 읆조리고 “ 운룡(雲龍)과 풍호(豊虎)를 남김없이 치고 나자./ 태백성이 달에 가리어 졌네.”라는 명구를 남기고 하늘의 일각에 그 모습을 의연하게 드러냈다 홀연 연기처럼 사라져간 것입니다.

속박을 물리치고 자유자재로 준발 호방하여 화려하면서도 술과 여자, 꽃으로 대비되는 불길 같은 기운이 하늘의 태양처럼 비추는 웅장한 가락의 풍월에는 고창한 기품이 넘치고 천지와 조화를 이루는 즉흥적이고 천재적인 기상을 품어대는 시상은 여명과 함께 찾아드는 새벽의 장엄한 노을빛으로 승화된 자연 그대로의 관현악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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