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미 25사단은 오성산 자락의 538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미군이 538고지 위에 나타나기만 하면 중공군 저격병에 저격당하기 일쑤였다.
여기에서 미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미군들이 이 능선을 ‘Sniper ridge’라고 부른 데서 저격능선으로 이름 붙여졌다.
저격능선 참전전우 회원들과 이순진(왼쪽 넷째) 육군2사단장, 철원군수 등 지역 기관장들이 지난 2일 강원 철원군 김화읍 와수리 저격능선 전적비 앞에서 추모행사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52년 10월 상당 기간 지지부지하던 휴전회담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휴전이 이뤄지고 군사분계선이 그어진다면 유리한 지역을 확보해야 한다. 피아간 이런 판단은 저격능선을 사생결단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김일성은 “평양을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오성산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며 독전했다. 김일성이 결사 항전 의지를 불태웠던 오성산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접근로가 바로 저격능선이었다.
당시 유엔군사령부에는 휴전을 앞두고 ‘현 전선 유지’라는 지침이 내려져 있었다. 제임스 벤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이러한 지침 때문에 북한 공격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이때 국군은 ‘공격 능력을 보여 준다’는 쇼다운(Show down) 작전을 구상했다. 아군 2사단이 저격능선을 공격하면 미 7사단은 저격능선 좌측의 3각 고지를 점령한다. 적의 아성인 오성산의 두 날개를 접어버린다는 작전이다.
유엔군사령부의 작전 승인을 받은 2사단 32연대 3대대는 공격을 시작했다. 6·25전쟁 중 사실상 국군의 첫 선제공격이었다. 포병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됐다. 군단 예하 9개 포병대대 162문의 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저격능선 초목은 화염으로 뒤덮였고 지축은 파이고 무너져 내렸다. 아군이 천신만고 끝에 정상을 확보했다. 하지만 진지 배치도 끝내기 전에 중공군 야간 역습이 시작됐다. 무려 42차례 철수했다 공격하고, 공격했다 철수하고 밀고 밀리는 혈전이 벌어졌다.
11월 17일 아침 마침내 저격능선은 완전히 국군 손에 들어왔다. 32연대와 함께 공격 임무를 받은 17연대 2대대가 적을 소탕했다. 적 사살 7591명, 부상 7204명, 포로 72명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적 주력인 중공군 31·45사단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오성산 후방으로 물러갔다. 하지만 우리 군도 1128명의 전사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지난 2일 저격능선 참전전우회(회장 김석근) 300여 명의 회원이 58년 전 그 격전의 현장에 다시 모였다. 먼저 간 전우들의 넋을 기리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남은 여력을 보태기 위한 결의를 다졌다.
전우들은 42차례의 백전병을 벌인 아비규환의 저격능선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며 조국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살아남은 노병들은 옷깃을 여미고 참전비에 새겨진 비문을 읽어 내려갔다.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역전의 노병들 눈에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전우야 잘 자라. 그리고 우리만 살아 있어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