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최근 농가를 방문해 컨설팅을 하던 중 밤호박 이야기가 나왔다. 농가의 남편은 여러 해 동안 시설에서 유기농 밤호박을 재배해 왔는데 올해는 재배하지 않았다고 했다. 가격이나 판로가 이유인가 싶었는데 뜻밖에도 꽃의 수분 작업 때문이었다.
밤호박 시설 재배에서 수분은 착과를 좌우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특히 이 농가의 밤호박 생산 시기는 벌을 비롯한 방화곤충의 활동이 둔한 때와 겹쳤다. 자연수분에 의존하기 어려워 안정적인 착과를 위해 인공수분이 필요했다. 호박꽃은 이른 아침에 피고 꽃가루의 활력이 좋은 시간에 수분해야 하므로 작업시간도 제한된다.
주변의 관행재배 농가에서는 착과를 돕는 시판 자재를 이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농가는 유기농 밤호박을 시설 재배하면서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수꽃의 꽃가루를 붓에 묻힌 다음 암꽃의 주두에 일일이 옮겨 주는 손수분을 했다. 재배면적이 넓어지면 아침마다 개화한 암꽃을 찾아다니며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수년간 계속된 이 노동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결국 올해 유기농 밤호박 재배를 포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와 참다래의 물수분이 떠올랐다. 배와 참다래에서는 꽃가루를 적절한 용액에 현탁해 암술머리에 살포하는 물수분 기술이 이용되고 있다. 시설채소에서도 작물과 재배환경에 따라 벌을 이용하거나 착과를 돕는 자재를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호박에서도 물수분을 이용할 수 있을까. 관련 연구와 특허를 살펴보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중국에서는 동과의 꽃가루를 액체에 현탁해 암꽃의 주두에 살포하는 액체수분 방법이 특허로 제시되어 있으며, 적용 가능 작물에 호박·수박·멜론·오이 등 박과작물이 포함되어 있다. 수박에서는 꽃가루 현탁액을 이용하는 수분장치 특허도 확인된다. 박과작물 꽃가루의 액체배지 발아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자료가 우리나라 밤호박 농가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현장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우리 재배환경에 맞는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단서는 된다. 유기농 밤호박 시설 재배 농가가 여러 해 동안 반복해 온 손수분의 어려움도 현장 애로기술로 발굴되었다면 연구기관에서 검토하고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는 과제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이 ‘농업기술의 사각지대’이다. 지금은 AI를 통해 세계 각국의 논문과 특허를 짧은 시간에 찾아볼 수 있고 농업정보도 빠르게 공유된다. 농민 역시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한다. 이러한 변화는 농업기술기관의 역할을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어떤 기술이 과학적으로 타당한지 검토하고, 지역의 품종과 재배환경에 맞는지 시험하여 농가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로 만들어 주는 전문적인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기술원과 시군 농업기술센터는 농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술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조직이다. 농민이 기술을 문의하면 답을 알려주는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농가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어떤 작업에서 노동력이 과도하게 투입되는지, 어떤 문제 때문에 품질과 생산성이 떨어지는지, 기존 기술로 해결되지 않아 포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농업기술센터가 발견한 문제를 농업기술원과 농촌진흥기관의 연구로 연결하는 체계도 중요하다. 현장에서 바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지도사업으로 해결하고, 시험이 필요한 문제는 농업기술원의 연구과제로 연결하며, 보다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은 농촌진흥청이나 대학 등과 협력할 수 있다. 이렇게 현장의 작은 문제가 연구와 기술개발의 출발점이 되는 흐름이 활발하게 작동해야 한다.
이번 글은 필자가 전남인터넷신문에 연재해 온 농업칼럼의 1600회째 글이다. 오랫동안 농업 현장을 접하면서 느낀 것은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현장에는 크고 작은 기술 사각지대가 계속 생겨난다는 점이다. 새로운 작목이 도입되고 재배방식이 달라지며 유기농업과 시설재배가 확대될수록 기존의 표준기술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나타난다.
AI 시대라고 해서 농업기술기관과 농민의 거리가 멀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자주 농가를 만나고 더 세밀하게 현장을 살펴야 한다. 농민이 재배를 포기한 뒤 원인을 파악하는 것보다 포기를 고민하게 만든 작은 어려움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선 농업기관이 현장 곳곳에 숨어 있는 농업기술의 사각지대를 선제적으로 찾아내고, 연구와 기술지도를 통해 하나씩 메워 나가길 기대한다. 유기농 밤호박 농가가 결국 내려놓았던 작은 붓 하나는 그러한 현장 기술지도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1400회 농업 칼럼에 담긴 전남 농업.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1.19.).
허북구. 2020. 미국과 유럽에서 확대되고 있는 지역 지원형 농업.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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