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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뱃길과 전남 차문화 - 농업 칼럼리스트·농학박사 허북구
  • 기사등록 2026-08-14 08: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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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한국 차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기록은 『삼국사기』 흥덕왕 3년(828)의 기사이다. 당에 갔다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茶種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내용이다. 같은 기록에는 차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따라서 828년은 차의 최초 유입 시점보다 차 재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그동안 828년 차 종자에 관한 관심은 주로 어디에 심었는가에 집중되어 왔다. 지리산 화개 일대를 시배지로 보는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고, 지리산 화엄사와 연결해 해석한 연구도 있다. 이에 비해 대렴이 당에서 어떤 지역을 거쳐 귀국했는지, 차 종자가 어떤 교통로를 통해 신라에 들어왔는지에 관한 연구와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전남 차문화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차의 재배지와 함께 차가 들어온 뱃길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당나라의 차 산지와 신라의 대외교통망을 함께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는 당대의 차 산지가 산남(山南), 회남(淮南), 절서(浙西), 검남(劍南), 절동(浙東), 검중(黔中), 강남(江南), 영남(嶺南) 등 8개 권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강남과 절동·절서 등 중국 중남부에는 중요한 차 생산지가 넓게 분포했다. 이 지역은 황해와 동중국해를 통해 한반도 서남해와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전남의 뱃길은 이점에서 중요해진다. 통일신라시대 전남 서남해는 중국과 신라,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교통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완도 청해진을 비롯해 나주 회진, 영암 구림 일대의 상대포, 흑산도 등은 서로 성격과 활동 시기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전남의 대외 해상교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들이다. 특히 9세기 이후에는 중국 강남지역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이 활발해졌다. 따라서 중국 차 산지와 연결되는 해상교통로의 한쪽에 전남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남 차문화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부분이다.

  

불교와 선종 승려들의 이동도 이러한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라 승려들이 당으로 건너가 선종을 배우고 돌아왔다. 이들이 수행했던 지역에는 강서·절강 등 중국 남부지역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곳은 당대 차 생산과 소비가 활발했던 지역과 공간적으로 겹친다. 중국의 사찰에서는 차가 수행과 일상생활에서 널리 이용되었으므로 입당 승려들이 선법과 함께 현지의 차문화를 경험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귀국한 선승들의 활동지역 역시 전남 차문화와 함께 살펴볼 만하다. 826년 홍척은 귀국한 뒤 지리산 실상사를 중심으로 선종을 펼쳤고, 혜철은 곡성 태안사, 체징은 장흥 보림사, 도윤은 화순 쌍봉사 등 호남 곳곳에서 선종의 기반을 형성했다. 통일신라 말에는 당에서 선종을 배우고 돌아온 형미가 강진 무위사에 머물며 활동했다. 이처럼 중국에서 수행한 선승들과 전남의 여러 사찰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차문화의 이동경로를 살피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신라 후기로 가면 중국과 전남을 연결하는 승려들의 이동경로가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중국 남부에서 수행한 선승들이 바다를 건너 서남해로 귀국했고, 나주 회진을 비롯한 전남의 포구가 실제 귀국지로 기록된 사례도 나타난다. 이는 중국 남부의 선종 중심지와 전남의 사찰을 연결하는 사람의 해상 이동경로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차와 차 종자의 이동을 직접 증명하는 기록은 아니지만, 중국의 차문화권과 전남을 연결했던 인적·해상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남에 널리 전승된 돈차도 이 같은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돈차는 찻잎을 찌고 찧어 일정한 형태로 성형해 건조하는 차로 『다경』에 나타나는 당대 병차(餠茶) 제법과 비교할 요소가 많다. 전남 여러 지역에서 근현대까지 돈차를 만들고 마셨던 흔적이 확인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중국의 오래된 제다문화와 전남의 돈차문화 사이에 어떤 문화적·역사적 연결이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사찰과 뱃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앞으로 더욱 연구할 부분이다.

  

828년 대렴이 가져온 차 종자의 식재지는 기록에 남았지만 이동경로에는 여전히 빈 공간이 많다. 대렴이 당의 어느 지역에서 차 종자를 구했는지, 어느 항구에서 출발했는지, 어떤 항로를 이용했으며 신라의 어느 곳으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로 이 때문에 ‘어디에 심었는가’와 함께 ‘차는 어디에서 어떤 길을 따라 들어왔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전남은 중국과 연결되는 서남해 해상교통의 중요한 공간이었고, 그 바다 건너에는 당대의 주요 차 산지와 차문화권이 있었다. 그 길을 사신과 상인, 승려가 오갔으며 물산과 종교, 생활문화도 함께 이동했다. 전남 차문화의 역사를 보다 깊게 이해하려면 차나무가 자란 곳뿐만 아니라 차와 사람이 들어온 전남의 뱃길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 중국의 차 산지와 전남을 연결했던 해상교통망은 전남 차문화의 형성과 전승을 새롭게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참고문헌

허북구 등. 2008. 전남지역에서 1930-40년대에 이용되었던 돈차의 이름, 형태 및 용도 조사. 인간식물환경학회 추계 학술대회집 pp. 200-202.

허북구. 2014. 근대 전남의 돈차 문화와 청태전. 세오와 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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