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동지팥죽은 흔히 팥의 대표 음식처럼 말해진다. 팥 하면 팥죽, 팥죽 하면 동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내게 팥죽은 단순한 절기 음식이 아니다. 나는 강진군 성전면의 한 큰 동네에서 자랐다. 어른들은 우리 동네가 학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양이라고 했다. 가운데 몸통은 잔등이 있고, 오른편과 왼편으로 학의 날개처럼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100가구가 넘게 모여 살던 큰 동네였다. 골목을 중심으로 큰잔등과 작은잔등에 집들이 이어졌고, 그 골목은 내 유년의 운동장이자 학교였다.
겨울이면 오빠들은 대나무스키 타고 우린 썰매를 탔다. 봄이면 양지바른 골목에 앉아 어른들이 보았다는 귀신 이야기를 서로가 질세라 했다. 무서운 이야기는 단지 무서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선과 악, 해서는 안 되는 일과 지켜야 가야 할 의식을 자연스레 읽혔다. 여름이면 동네 앞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로 모였다. 어른들은 그 나무를 신이 깃든 느티나무로 섬겼고 우리에겐 그늘이었다. 몇백 년을 버텨온 그 그늘 아래에서 우리는 놀고, 어른들은 쉬어서 갔다.
그 시절 아이들의 놀이는 참 많았다. 넓적한 돌로 영역을 넓히는 목과놀이, 고무줄놀이, 돌집기, 구슬치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대나무기차놀이까지 하루해는 짧았고 나는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야 저산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집으로 갔다. 영화 <오징어 게임> 놀이들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상대는 적이 아니었다. 놀이를 함께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친구가 있어야 놀이가 있었고, 놀이가 있어야 긴 여름 낮이 행복했으니 행복은 혼자가 아닌 함께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배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이 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혼자 먹는 음식은 배를 채우지만, 함께 먹는 음식은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 내 기억 속 팥죽은 동지에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 된 여름이 시작하면서부터 먹는 여름철 음식이다. 큰집에서는 열흘이 멀다 하고 일가친척들이 모여 마당에서 팥죽을 먹었다.
그 자리는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어른들만의 문중 모임이 아니라, 어른과 아이가 함께 문중의 역사와 조상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가 어느 집안의 어른이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우리는 그 이야기의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를 밥상머리에서 배웠다. 그래서 나는 음식은 영양이기 이전에 거대한 서사를 만드는 장소라고 믿는다. 밥상 위의 대화가 있는 삶,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국민복지일지도 모른다. 좋은 음식은 몸을 살리고, 좋은 밥상은 관계를 살린다. 음식은 맛보다 함께하는 이야기다.
엄마는 큰집 행사가 없는 중간중간 팥죽을 집에서 만들었다. 마당에는 덕석이 펴지고, 쑥 모깃불이 피어올랐다. 여름밤의 습기와 풀냄새, 모깃불 연기와 팥죽 냄새가 뒤섞이면 그 자체로 한 편의 오래된 영화가 되었다. 식사가 끝나면 우리 자매들은 밤하늘 아래 모여 앉았다. 별 이야기에서 시작한 말은 아버지와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우리의 미래까지 이어지는 별은 등불과도 같았다. 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워도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그 시간은 삶이 우리에게 건네준 가장 넉넉한 선물이었다.
장독대 위에는 동네 친구들을 위한 팥죽이 놓여 있었다. 언니와 오빠의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와서 그 팥죽을 가져갔다. 누가 가져갔는지 묻지 않았고 으레 우린 누군가를 위한 팥죽 한 그릇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와도 같았다. 동네 아이들도 죽을 때까지 가져갈 추억을 그 밤에 먹었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팥죽이 있다.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문득 나타나는 친구들, 그리운 얼굴들, 여름밤의 웃음소리와 별빛이 함께 담긴 팥죽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소중해진 추억을 보물처럼 갖고 있다. 음식은 지나간 시간을 불러내는 힘이 있다. 특히 팥죽처럼 함께 나누어 먹던 음식은 사람의 기억을 가장 따뜻한 온도로 데워준다.
동지팥죽은 본래 겨울의 음식이다. 밤이 가장 길고 추위가 깊어지는 때, 사람들은 붉은 팥을 삶아 죽을 쑤었다. 팥에는 필수아미노산과 비타민 B1이 들어 있어 겨울철 원기를 보태는 데 도움이 된다. 칼륨 성분도 풍부해 몸을 잘 움직이지 않는 계절에 부기를 덜어주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붉은 팥의 항산화 성분과 사포닌 역시 건강 식재료로서의 가치를 더한다.
그러나 팥의 가장 오래된 힘은 어쩌면 영양성분보다 믿음에 있다. 우리 조상들은 붉은 팥이 악귀를 물리친다고 믿었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않기를 빌었다. 과학의 언어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 풍습은 미신이라기보다 삶을 지키려는 공동체의 마음이었다. 어둡고 긴 겨울밤, 사람들은 붉은 팥죽 한 그릇으로 두려움을 달래고 새해의 무사함을 기원했다.
발효를 공부하고 음식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나는 음식의 본질이 변화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콩이 장이 되고, 쌀이 식초가 되고, 시간이 맛을 바꾸듯 사람의 기억도 세월을 지나며 깊어진다. 팥죽은 어린 시절 단지 맛있고 따뜻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세월속의 팥죽은 내게 마을 공동체의 상징이고, 가족의 역사이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지켜주던 방식이었다.
오늘날 K푸드는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다. 김치, 장, 막걸리, 비빔밥, 떡볶이만이 K푸드는 아니다. 동지팥죽처럼 절기와 믿음, 가족과 마을의 기억을 품은 음식이야말로 한국 음식문화의 깊이를 보여준다. K푸드의 힘은 자극적인 맛에만 있지 않다. 계절을 읽고, 몸을 살피고, 이웃과 나누며,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위로하는 데 있다.
내게 팥죽은 6월 여름철 음식이다. 그리고 사람이 있는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오래된 믿음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는 음식이다. 결국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것은 팥의 효능만이 아니다. 그 팥죽을 함께 먹던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누었던 말들, 그리고 그 시절 우리를 지켜냈고 지금 아름다운 시절을 불러오는 마법의 음식이다.
참고문헌
곽경자. 2026. 모내기철 막걸리 한 잔에 담긴 발효의 힘.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6-12).
곽경자. 2026. 죽순의 계절, 대숲이 차려낸 봄의 보양식.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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