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막걸리의 계절이 왔다. 모내기가 한창이다. 요즘 들판은 기계 소리 몇 번 지나가면 일주일 만에 파랗게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의 모내기는 한 달 가까이 이어지는 마을의 큰 잔치였다. 논마다 사람의 웃음소리가 번졌고, 국민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못줄을 잡은 손과 손 사이로 한 해 농사의 첫 리듬이 시작되었다.
그때 오빠들은 국민학생이었지만 농번기라 하여 반나절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논으로 나갔다. 못줄을 잡고, 점심을 나르고, 새참을 챙기고, 무엇보다 막걸리 심부름을 했다. 그 시절 논둑 위의 막걸리 한 사발은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땀 흘린 노동을 위로하고, 굽은 허리를 잠시 펴게 하고, 흥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발효의 음료였다.
막걸리는 곡물과 누룩, 물이 만나 5일에서 7일가량 발효되어 만들어진다. 쌀의 전분은 당으로 바뀌고, 효모는 그 당을 먹고 살아 움직이며 술과 산미, 향을 만든다. 그래서 막걸리는 흔히 ‘쌀로 만든 요구르트’라고도 불린다. 물론 알코올이 들어 있으니 과음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적당한 한 잔이 농사일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하고, 흥을 돋워 일을 놀이처럼 느끼게 했다는 기억은 결코 억지만은 아닐 것이다.
농사일은 시작부터 끝까지 허리를 숙이는 일이다. 특히 모내기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옆 사람과 보폭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일이다. 허리를 펼 틈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 어른들의 얼굴에는 병색보다 흥이 먼저 보였다. 밥을 먹고 논둑에 앉아 김치, 젓갈,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면 속이 편안해지고 몸에 다시 기운이 돌게 한다. 오늘날 장 건강을 주도하고 있는 요구르트의 원형이다.
나는 현미식초를 연구하며 쌀 발효의 가능성을 오래 바라보았다. 우유에서 온 유산균이 세계 요구르트 시장을 이끌어왔다면, 우리에게는 쌀에서 온 발효의 세계가 있다. 막걸리, 식초, 김치, 젓갈은 각각 다른 모습이지만 결국 자연 속 미생물과 사람이 함께 만든 생명의 음식이다.
특히 현미식초는 쌀의 영양과 발효의 시간이 만나 깊은 산미와 생리활성 성분을 품는다. 막걸리가 짧은 발효의 생동감이라면, 현미식초는 긴 시간 숙성된 발효의 사유라 할 수 있다.
나는 오래전 KBS 수요기획 ‘2009 막걸리가 달린다!’를 가슴 설레며 보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의 식탁 위로 달려가는 장면이었다. 발효를 업으로 삼은 내게는 누룩 한 줌, 쌀 한 톨, 항아리 속 시간은 미래의 기술이다. 발효는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논둑에서 막걸리 한 잔을 드시고 들판이 들썩이도록 웃으셨다. 그 웃음 속에는 고된 노동도 있었고, 가족을 먹여 살린 책임도 있었고, 발효가 준 작은 위로도 있었다. 지금쯤 아버지는 어디쯤에서 막걸리 한 잔에 어깨춤을 추고 계실까. 바람 부는 논둑길 끝에서 아직도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참고문헌
곽경자. 2026. 죽순의 계절, 대숲이 차려낸 봄의 보양식.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6-4).
곽경자. 2026. 지친 현대인을 살리는 바다의 산삼 낙지 한 접시.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5-26).
곽경자. 2026. 보리밥 열무김치 비빔밥, 발효음식 속에 담긴 흥 문화.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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