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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가족농과 미국의 파머스 퍼스트 정책 - 농업 칼럼니스트 농학박사 허북구
  • 기사등록 2026-05-27 08: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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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한때 우리 농촌에서는 산비탈의 작은 논도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물만 있으면 돌을 골라내고 둑을 쌓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도로조차 없던 시절, 농민들은 지게로 거름과 수확물을 나르며 작은 땅 한 조각까지 일궈 식량을 생산했다. 농업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가족의 생존이자 지역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반이었다. 그런데 지금 농촌의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농촌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해 산간의 작은 논과 밭은 잡초만 무성한 채 묵혀지는 곳이 많아졌다.

 

농업 정책 역시 생산성과 효율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농지는 기계화를 위해 대구획화되고, 스마트팜과 AI, 로봇농업, 식물공장, 수출농업이 미래 농업의 핵심처럼 이야기된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시대 흐름이다. 노동력이 부족한 현실에서 기계화와 스마트농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생산성을 높이고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농업을 지나치게 규모화와 효율 중심으로만 바라볼 경우 농촌 공동체 자체가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세계 농정의 흐름은 바로 이 지점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럽연합(EU)은 오랫동안 공통농업정책(CAP)을 통해 생산성 향상과 농업 경쟁력 강화를 추진해 왔다. 그런데 농가 수 감소와 농촌 공동화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발표된 ‘2040 농업과 먹거리 비전’에서도 가장 먼저 제시된 목표는 경쟁력 강화가 아니라 “공정한 생활 수준 확보와 매력적인 농업 구조”였다.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농가 수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유럽은 최근 보조금 정책에서도 소규모 농가를 우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프랑스 역시 과거 수십 년 동안 농지 통합과 기계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였지만, 그 과정에서 농촌의 활력이 약화되고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일정 규모 이하의 농가를 유지하고 지역 농업 기반을 지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 농무부는 최근 “파머스 퍼스트(Farmers First)” 정책 기조를 내세우며 가족농 보호를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특히 2025년 브룩 롤린스(Brooke Rollins) 농무장관은 “Farmers First: Small Family Farms Policy Agenda”를 발표하며 소규모 가족농 지원 정책을 공식화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단순하다. 미국 농업의 기반은 여전히 가족농이며, 이들이 무너지면 농촌과 식량안보 역시 흔들릴 수 있다는 인식이다. 미국 농가의 약 86%가 가족농 형태라는 점도 강조되었다. 정책 내용에는 농민 행정 절차 간소화, 농지 보호, 세대 승계 지원, 농업 금융과 신용 확대, 재해 대응 강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농지를 단순 투자 자산이 아니라 실제 농업 생산 기반으로 유지하려는 시각이 강해지고 있다. 여기에 식량안보와 국가안보를 연결하는 흐름도 뚜렷하다.

  

미국은 농업을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국가 전략 산업으로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 농업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진국들조차 가족농과 농촌 유지 문제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업을 단순히 생산량과 수출 규모로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남은 전국에서도 가족농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논과 밭의 규모는 작지만 오랜 농촌문화와 공동체, 다양한 품목 생산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 농촌학교 폐교, 청년 유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농업 생산 기반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자체의 지속 가능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대규모화와 효율성만이 아니라 가족농이 소외되지 않도록 함께 고려하고 지원하는 균형 있는 농정이다.

 

첨단농업과 스마트농업을 추진하더라도 지역의 가족농이 함께 참여하고 지속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앞으로의 농업은 단순 생산 경쟁만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치유농업, 농촌관광, 지역 식문화, 로컬푸드, 생태환경, 농촌 체험과 같은 가치 산업과 결합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가족농은 오히려 이러한 분야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다. 작은 규모라도 지역성과 이야기, 관계와 경험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은 자연환경과 농촌문화, 음식문화 자원이 풍부하다. 이를 활용한 치유농업과 체험농업, 농촌관광, 정원문화, 발효식품 산업 등은 가족농 중심 구조와도 잘 연결될 수 있다. 청년농과 귀농·귀촌인, 은퇴자들이 이러한 분야와 연계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도 중요하다.

 

미국의 “파머스 퍼스트” 정책은 농업을 국가의 기반 산업으로 다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족농과 농촌 공동체가 있다. 전남 역시 이제는 농촌을 유지하고 사람을 남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농업은 단순한 생산 산업이 아니다. 지역을 지키고 공동체를 유지하며 국가의 식량 기반을 떠받치는 산업이다. 세계 농정이 다시 가족농을 바라보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6. 전남 농업, 소득 구조를 바꿔야.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의 농업칼럼(2026.5.26.).

허북구. 2026. 전남 농업 구조 재설계, 승계를 넘어 청년 참여로.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의 농업칼럼(2026.3.19.).

山田優氏. 2026. 構造改革の陰で消える田んぼ 欧米では小規模農家支援に軸足. JA.com日本農業協同組合新聞(2026.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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