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함께 추진 중인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지원 사업」을 통해 잊혀져 가던 열세 번째 인물, 김도여 선생(1867~1917)의 삶을 다시 세상에 불러냈다.광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김도여 선생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대표적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민족 자치와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후손의 정확한 행방이 확인되지 않아 고려인마을과 고려신문은 그의 후손을 찾기 위한 기록 발굴과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
1867년 함경북도 이원군에서 태어난 김도여 선생은 1901년경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낯선 땅에서의 삶은 단순한 생계를 넘어 조국 독립을 향한 또 하나의 투쟁의 길이 되었다.
1911년 그는 이상설, 이종호 등과 함께 연해주 한인 사회의 대표적 자치·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 조직에 참여했다. 권업회는 경제적 자립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운동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던 단체로, 김도여 선생은 의원과 총무를 거쳐 회장으로 활동하며 한인 사회의 경제적 안정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특히 「권업신문」 발간과 교육 진흥, 한인 자치 조직 운영 등을 통해 연해주 동포사회의 중심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914년에는 신한촌 거류민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동포 사회를 이끌었고, 이후 경애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교육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또한 이동휘 등과 함께 애국저금단을 조직해 독립전쟁 자금을 모으는 활동에 참여했으며, 북빈의용단과 대한광복군정부 계열 독립운동에도 협력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러시아 당국이 한인 단체들을 해산시키면서 권업회와 「권업신문」도 폐간되었다. 항일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고 김도여 선생 역시 신한촌을 떠나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숨어 지내야 했다.
혹독한 도피 생활 속에서 병을 얻은 그는 결국 1917년 2월 4일 연해주에서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연해주 한인 사회에 큰 슬픔을 남겼다. 이동휘와 이상설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장례를 주관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그를 “극동 동포 모두가 의지하던 만리장성과 같은 인물”이라 평가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의 삶과 달리, 후손의 행방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광주 고려인마을 관계자는 “연해주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아직도 역사 속에 흩어져 있다”며 “김도여 선생의 후손을 찾는 일은 잊혀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복원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한 세기 전 연해주의 작은 공동체에서 조국 독립을 꿈꾸며 동포들을 이끌었던 지도자 김도여. 그의 이름은 지금, 후손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다시 불리며 잊혀진 역사를 깨우고 있다.
고려방송:이부형(고려인마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