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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풍속의 변화와 나주배 산업의 전환점 - 농업 칼럼니스트 농학박사 허북구
  • 기사등록 2026-02-19 08: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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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설에 시골 고향을 다녀왔다. 산천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지만, 설 풍경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한때는 마을 어귀부터 분주했다. 아이들은 일가친척은 물론 이웃 어르신들께까지 세배를 다녔고, 집집마다 떡국과 유과, 과일을 넉넉히 준비해 두었다. 설 차례상 한가운데에는 크고 반듯한 배가 놓였다. 배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한 해의 풍요와 정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차례는 간소화되거나 생략되고, 산소를 찾는 발걸음도 줄었다. 설에 고향을 찾는 이유 역시 조상을 모시는 의례보다는 부모님의 안부를 살피는 방문에 더 가까워졌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경우에는 여행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다. 명절의 형식이 변하면서 차례상도, 그 위에 오르던 과일의 의미도 함께 달라지고 있다.

 

이 변화는 곧바로 나주배 등 과수 산업에 영향을 미친다. 배와 사과는 오랫동안 설과 추석 명절 특수에 기대어 성장해 왔다. 크고 모양이 고른 대과(大果)는 차례상과 선물 세트의 중심이었고, 추석전 출하와 설까지 저장해 두었다가 출하하는 것은 농가 소득의 중요한 축이었다. 저장과 선별, 유통 구조 역시 명절 수요를 전제로 형성되었다. 명절은 단순한 소비 시기가 아니라 생산 전략을 결정하는 기준점이었다.

 

하지만 차례상 축소와 선물 문화의 변화는 대과 위주의 소비 구조를 흔들고 있다. 최근 소비자는 크기보다 맛과 식감, 보관의 편의성과 소포장을 더 중시한다. 가족 단위가 줄어든 현실에서 예전처럼 큰 배 한 상자를 소비하기는 쉽지 않다. 명절 중심 소비가 약화되는 지금, 국내 대표적인 배산지인 나주배 산업은 분명한 전환점에 서 있다.

 

과수는 단기간에 전환이 어려운 산업이다. 배나무를 식재해 성목이 되어 안정적인 수확을 올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품종을 갱신하고 과원을 재편하는 데에도 수년이 소요된다. 그만큼 소비 구조의 변화를 미리 읽지 못하면, 생산은 과거를 향하고 시장은 미래를 향하는 엇박자가 발생한다. 지금 설 명절 풍속의 변화는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신고’ 품종 위주의 나주배 산업 전반에 구조적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추석과 설 차례상이 축소되는 흐름을 되돌리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를 위기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해석해야 한다. 명절용 대과 및 추석 전 출하용 신고 중심의 재배 전략에서 벗어나, 당도와 식감의 차별화, 숙기 분산을 통한 출하 시기 다양화, 중·소과 전략, 1~2인 가구를 고려한 소포장 확대 등 소비 구조 변화에 맞춘 대응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배를 제수용 과일이 아니라 사계절 일상에서 즐기는 건강 과일로 재정의해야 한다.

 

또한 과원 체험, 직거래 확대, 가공 상품 개발, 지역 관광과 연계한 복합 모델도 고민할 시점이다. 배를 ‘상 위의 과일’에서 ‘생활 속의 과일’로 전환하지 못한다면, 명절 특수에 의존한 구조는 점점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설과 추석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시간이다. 다만 그 의미와 형식이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차례상이 줄어든 자리에 아쉬움만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변화의 신호를 읽고 산업 구조를 재편할 것인가. 급변하는 명절의 풍경은 지금 나주배 산업이 과거의 명절 특수에 머물 것인지, 일상 소비 중심의 구조로 도약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주목할 사례가 있다. 일본의 과일 산업은 특정 명절 수요에 과도하게 의존하기보다는, 출하시기·품종·당도·식감 등 소비자의 기호에 맞춘 세분화 전략을 통해 일상 소비 기반을 확대해 왔다. 고급 선물용 시장과 동시에 소포장·컷과일·다품종 시장이 공존하는 구조를 만들어 계절 변동의 충격을 완화하고 있다. 이는 과일을 ‘의례용 상품’이 아니라 ‘생활 속 기호 식품’으로 재정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설 풍속의 변화는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질문이다. 일본의 사례가 보여주듯, 변화하는 소비 구조를 읽고 생산 체계를 선제적으로 조정하는 산업만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는 일, 그것이 지금 나주배 산업이 맞이한 진정한 전환점이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4. 나주배, 품종 내 세워야.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 농업칼럼(2024-09-10).

허북구. 2022. 나주배와 일본 고향세 인기 배 품종. 전남인터넷신문 농업칼럼(2022-10-11).

허북구. 2021. 추석에 배를 먹어야 하는 이유. 전남인터넷신문 농업칼럼(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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