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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작물 메밀, 전통 발효가 빚은 설날의 메밀묵 - 곽경자 이학박사(식초담다 대표, 전남도립대학 식품생명과학과 겸임교수)-
  • 기사등록 2026-02-18 09: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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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설날 밥상 위에 오르던 메밀묵 한 접시는, 척박한 땅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내던 생명의 힘이었고, 그 힘으로 자식을 보듬던 어머니의 사랑 그 자체에 비유된다. 기름진 산해진미가 아니라, 검소한 곡물 한 그릇이 명절 상의 중심에 놓였다는 사실은 우리 세대의 삶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말해준다.

  

메밀은 많은 양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비가 넉넉하지 않던 시절, 천수답 논이 갈라지고 흙먼지가 일던 자리에도 메밀은 묵묵히 뿌리를 내렸다. 다른 작물이 고개를 떨굴 때에도 60~80일이면 꽃을 피워내는 빠른 생육 주기, 거친 토양과 큰 일교차에도 흔들리지 않는 적응력은 그 자체로 생태적 회복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메밀은 단순한 구황작물이 아니라, 무너진 땅의 균형을 다시 세우는 ‘회복의 식물’이었다. 겨울 끝자락 설 무렵, 움츠러든 혈관과 장부를 부드럽게 깨워 순환을 돕는 곡물, 그것이 바로 메밀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오가던 동구 밖 길, 가뭄이 들면 어김없이 하얗게 피어나던 메밀꽃은 황량한 들판을 덮으며 생명의 위로가 되었다. 바람에 흔들리던 그 흰 물결은 마치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기다림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어머니의 삶이 그 꽃과 닮아 있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자식의 끼니를 먼저 생각하던 마음, 그것이 메밀의 뿌리처럼 깊고 단단했다.

  

엄마는 설 사나흘 전부터 메밀쌀을 물에 담가 삭히셨다. 깨끗이 씻은 짚과 함께 반나절을 주물러 고운 물을 내고, 체에 걸러 까만 주물솥에 올려 천천히 저어가며 끓이셨다. 하얗게 뭉게구름 피어오르듯 부풀던 메밀물은 이내 점성을 얻어 묵으로 굳어갔다. 그 시간은 단순한 조리 과정이 아니라 기다림의 의식이었다. 

  

짚 속 고초균이 더해진 자연 발효는 메밀 특유의 향을 깊게 하고 탄력을 살렸다. 엄마의 손바닥에서 파르르 떨던 묵은 장독대 간장 한 스푼, 참기름 몇 방울, 갓 볶은 참깨를 넣어 함지박을 통째로 서너 번 흔들면 파르스름한 빛의 메밀묵으로 완성되었다. 설이 지나 대보름까지 저녁이면 온 가족의 간식이 되던 그 맛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발효가 빚어낸 생리적 균형의 맛이었다.

  

과학은 이 전통의 지혜를 뒤늦게 설명해 준다. 메밀 속 루틴과 폴리페놀은 겨울 동안 굳은 모세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수용성·불용성 식이섬유는 장내 미생물 환경을 정돈한다. 이는 단순한 영양 공급을 넘어 순환 촉진과 염증 완화, 해독 기능을 돕는 생리적 흐름을 만든다. 특히 짚과 함께한 전통 반발효 메밀묵은 미생물 생태가 더해지며 체내 항상성 회복에 의미를 더한다.

  

전통 항아리 발효와 발효현미 슬러리, 흑초의 생리활성 및 분자유전학적 기전을 연구해온 필자는, 이러한 반발효 메밀묵 속 미생물 상호작용이 장내 유익균 증식과 면역 조절에 긍정적 신호를 줄 수 있음을 확인해왔다. 이는 단순한 향수의 문제가 아니다. 옛 방식 속에 축적된 경험은 오늘의 생명과학 언어로도 설명 가능한 체계였다. 전통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 식문화의 실마리다.

  

설이 다가오면 나는 다시 그 길을 걷고 싶어진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메밀을 삭히고 짚을 씻으며, 음식이 단지 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전하는 매개임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메밀묵 한 접시는 검소하지만 강한 곡물이 전하는 생명의 철학이다. 화려하지 않으나 깊고, 소박하지만 단단하다.

  

척박한 땅에서도 꽃을 피워내던 그 힘처럼, 메밀은 오늘도 우리 정신을 조용히 적신다. 설날 밥상 위의 메밀묵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회복과 순환, 그리고 사랑을 이어주는 현재형의 생명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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