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치유농업을 설명할 때 우리는 종종 프로그램의 구성이나 개별 활동의 효과를 먼저 이야기한다. 그러나 치유가 실제로 일어나는 지점은 활동의 목록이 아니라, 사람이 환경을 어떻게 지각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가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ames Jerome Gibson)이 제시한 ‘어포던스(affordance)’ 개념은 치유농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이론적 단서를 제공한다.
깁슨은 1904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쳤으며, 20세기 심리학의 흐름 속에서 행동주의와 인지주의 모두와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학문적 길을 개척한 학자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공군을 위해 조종사의 시지각 연구에 참여하면서, 인간이 환경을 ‘해석’하거나 ‘계산’하기 이전에 이미 환경을 ‘직접 지각한다’라는 문제의식에 도달했다.
이후 그는 인간의 지각을 뇌 안의 정보 처리 과정으로만 설명해 온 기존 심리학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하나의 생태적 체계로 파악하는 생태심리학(Ecological Psychology)을 정립했다. 그가 제시한 어포던스 개념은 사물이 지닌 고정된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환경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행동 가능성에 주목함으로써 오늘날 환경디자인, 건축, 인간공학, 치유환경 연구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깁슨에 따르면 환경은 결코 중립적인 배경이 아니다. 환경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특정한 행동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는 이를 어포던스라고 불렀다. 의자는 ‘앉을 수 있음’을, 계단은 ‘오를 수 있음’을, 손잡이는 ‘잡을 수 있음’을 제공한다. 중요한 점은 어포던스가 대상의 물리적 속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 조건, 경험, 심리 상태와 환경이 맺는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같은 흙이라도 아이에게는 놀 수 있는 공간이 되고, 농부에게는 일의 대상이 되며, 지친 도시인에게는 손으로 만져 긴장을 풀 수 있는 매개가 된다.
치유농업의 현장은 이러한 어포던스가 가장 풍부하게 작동하는 공간이다. 농장은 단순히 작물을 재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흙을 만질 수 있고, 식물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으며, 천천히 움직일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는 행동 가능성의 집합체다. 흙은 ‘만질 수 있음’을 제공하고, 씨앗은 ‘돌볼 수 있음’을 제공하며, 계절은 ‘기다릴 수 있음’을 제공한다. 이러한 행동 가능성들은 특별한 설명이나 해석 없이도 사람의 몸과 감각에 직접 작용한다.
이 점에서 치유농업은 자극을 주입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오히려 과도한 선택과 평가에 지친 사람에게, 다시 단순한 행동 가능성을 돌려주는 환경 설계에 가깝다. 깁슨의 이론에서 지각은 머릿속에서 계산되는 과정이 아니라, 몸이 환경과 직접 맞닿으며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치유농업 참여자가 흙을 쥐고, 잎의 질감을 느끼며, 작물의 무게를 손으로 가늠하는 순간, 그는 이미 환경과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설득하지 않아도, 환경이 먼저 행동을 이끈다.
치유농업에서 흔히 강조되는 ‘자율성’ 역시 어포던스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농장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가 강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걷고 싶으면 걸을 수 있고, 앉고 싶으면 앉을 수 있으며, 참여하고 싶을 때 손을 내밀 수 있다. 이는 농장이 ‘강요된 활동’이 아니라 ‘열려 있는 행동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참여자는 지시를 수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환경 속에서 스스로 반응하는 주체가 된다. 이때 회복은 과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타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어포던스가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지각된다는 사실이다. 우울하거나 불안한 상태의 사람에게 농장은 ‘쉬어도 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신체적으로 위축된 사람에게는 ‘천천히 움직여도 되는 장소’로 받아들여진다. 치유농업의 효과는 동일한 환경에서 일률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태에 맞게 다르게 열리는 어포던스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치유농업은 표준화된 자극보다 반복 방문과 체류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환경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지각되는 행동 가능성 또한 점차 확장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치유농업의 설계란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장벽을 제거하고 이미 존재하는 어포던스를 드러내는 작업에 가깝다. 너무 많은 설명판, 지나친 안내, 과도한 목표 설정은 오히려 환경이 제공하는 자연스러운 행동 가능성을 가린다. 반대로 흙길의 질감, 그늘의 위치, 도구의 무게, 식물의 높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이 치유의 방향을 결정한다.
깁슨의 어포던스 이론은 치유농업이 왜 기술이나 연출로 쉽게 대체될 수 없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회복은 정보 전달의 결과가 아니라, 환경 속에서 다시 ‘할 수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치유농업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치기보다, 다시 환경과 연결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이 연결이 회복의 출발점이며, 치유농업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
참고문헌
최연우. 2025. 치유농업 현장에서 실천하는 에이미 커디의 프레즌스.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12.28.).
치유농업과 스티븐 켈러트의 바이오필리아 이론.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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