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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동불거의 시대, 가장 오래된 위안 막걸리 한 잔 - 곽경자 이학박사(곽경자 식초담다 대표, 전남도립대학 식품생명과학과 겸…
  • 기사등록 2025-12-30 0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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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나는 술 예찬론자다. 그중에서도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아온 막걸리의 애찬론자다. 막걸리에 얽힌 에피소드도 적지 않지만, 애환으로 점철된 세월 속에서 소신이 꺾이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준 제일의 공신 역시 막걸리였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말 한마디보다 먼저 건네지던 흰 사발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도 믿는다.

 

나는 술이 주는 위안을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찾는 버릇이 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인간에게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긴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질서와 형식, 이성으로 대표되는 아폴론적 세계와 도취와 혼돈, 생명의 충동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는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지탱한다.

 

“삶은 예술을 통해 구원된다”라는 그의 말은, 이 세계를 회피하지 않고 껴안으려는 태도에 가깝다. 삶이 과도하게 정제될수록 인간은 타인과의 유대를 잃고,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레 디오니소스의 힘, 곧 술을 찾는다. 발효가 지닌 황홀과 혼돈을 가장 잘 담아낸 술이 바로 막걸리다. 막걸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주이자, 서민의 애환을 가장 오래 어루만져온 음식이다.

 

‘막 거른 술’이라는 이름처럼 막걸리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탁하다 하여 탁주(濁酒), 농부의 삶이 담겼다 하여 농주(農酒), 술지게미가 살아 있다 하여 재주(滓酒), 쌀의 흰빛을 담았다 하여 백주(白酒)라 불렸다. 이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는 증거다.

 

막걸리의 기원은 삼국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술 빚기를 즐긴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곡물을 누룩으로 발효한 술, 즉 막걸리의 원형이 이미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초기의 막걸리는 지금보다 훨씬 걸쭉해 식사에 가까운 술이었고, 농번기에는 허기를 달래는 액체 음식이었다.

 

막걸리의 핵심은 누룩이다. 누룩 속에는 곰팡이, 효모, 유산균이 공존하며 당화·알코올 발효·산미 형성을 동시에 이끈다. 이 복합 발효 구조는 한국 농경문화가 만들어낸 독특한 지혜다. 농번기와 김매기, 추수철에 일손을 멈추자마자 마실 수 있는 술, 배고픔과 피로를 동시에 풀어주는 술로 막걸리는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술은 신분에 따라 구분되었다. 양반과 의례에는 청주가, 백성과 농민의 일상에는 막걸리가 놓였다. 그러나 막걸리는 결코 천한 술이 아니었다. 양반가에서도 집에서 빚은 가양주를 제사 뒤에 함께 나누어 마셨고, 막걸리는 생활의 술로 가장 널리 쓰였다.

 

막걸리의 운명이 크게 흔들린 것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기였다. 가양주 금지와 주세령으로 지역별 누룩과 술 문화는 급격히 붕괴되었고, 1960~1970년대 쌀 부족 시기에는 쌀 막걸리가 금지되며 밀가루와 전분, 감미료가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걸리는 본래의 풍미와 철학을 잃고 ‘값싼 노동자의 술’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전통 누룩 복원과 지역 쌀 사용, 생막걸리와 자연발효 막걸리가 재조명되면서 막걸리는 다시 발효음식이자 한국의 테루아를 담은 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막걸리는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형인 발효 문화다.

 

물론 과음은 금물이다. 막걸리는 알코올탈수소효소(ADH)에 의해 간과 위에서 대사되며, 에탄올은 아세트알데하이드로 산화된다. 이후 알데하이드탈수소효소(ALDH)에 의해 아세트산으로 전환되어 미토콘드리아의 구연산회로를 거쳐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아세트알데하이드는 강력한 독성을 지닌 발암물질로, 술 자체보다 인체에 더 큰 해를 끼친다. 알코올 중독과 장기 음주로 인한 많은 건강 위험 역시 이 물질의 독성에서 비롯되지만 과하지 않다면 막걸리 한 잔은 여전히 우리의 애환을 어루만지는 가장 현실적인 위안이다.

 

전국 대학교수들이 뽑은 2025년의 사자성어는‘변동불거(變動不居)’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안정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시대일수록 거창한 처방보다, 가족과 이웃이 둘러앉아 나누는 막걸리 한 잔이 필요하다. 변동불거의 시대, 서민에게 허락된 가장 소박하고도 깊은 힐링은 여전히 그 한 잔 속에 있다. 막걸리는 한국인의 삶과 발효 지혜가 녹아든 ‘마시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곽경자. 2025. 스트레스가 많은 연말, 엄동설한 상추로 디톡스해볼까.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12-23).

곽경자. 2025. 겨울 치유밥상, 엄마의 부뚜막 식초와 무생채굴초무침.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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