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치유농업과 스티븐 켈러트의 바이오필리아 이론 - 전주기전대학 치유농업과 최연우 교수
  • 기사등록 2025-12-26 08:50:44
기사수정

[전남인터넷신문]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물질 문명을 누리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정신적 공허와 정서적 고립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콘크리트 숲과 디지털 스크린에 포위된 현대인들에게 ‘자연’은 이제 여유가 있을 때 찾는 휴양지가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치료제로 부상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농업을 통해 심신을 회복하는 ‘치유농업(Agro-healing)’이 주목받고 있다. 이 새로운 농업 패러다임의 철학적 뿌리는 세계적인 생태학자 스티븐 켈러트(Stephen Kellert, 1943~2016)가 정립한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예일대 산림환경학부 교수였던 스티븐 켈러트는 평생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연구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에드워드 윌슨이 제안한 ‘바이오필리아’ 개념을 단순한 생물학적 가설을 넘어 인간의 삶의 질과 건축, 도시 설계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켈러트는 인간이 진화해 온 시간의 99% 이상을 자연 속에서 보냈기에, 우리 유전자에는 생명체와 유대감을 맺으려는 본능적인 갈망이 각인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과의 단절이 현대인의 스트레스, 인지 능력 저하, 정서적 불안의 근본 원인임을 지적하며, 자연을 가까이하는 환경이 인간의 생산성과 창의성, 그리고 신체적 회복력을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수많은 연구로 증명해 냈다. 그가 생전에 강조한 "자연은 사치재가 아니라 필수재"라는 메시지는 치유농업이 지향해야 할 나침반과 같다.

 

치유농업은 켈러트가 주창한 바이오필리아적 욕구를 가장 능동적으로 충족시키는 현장이다. 단순히 숲을 바라보거나 공원을 걷는 것이 수동적인 자연 경험이라면, 농업은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으며 생명의 주기를 직접 돌보는 ‘상호작용적 체험’이다. 켈러트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치유농업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의 회복력을 제공한다.

 

첫째, 오감을 통한 감각의 회복이다. 흙의 촉감, 풀냄새, 작물의 색채, 바람의 소리는 도시 생활에서 마비되었던 인간의 감각을 깨운다. 켈러트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직접적인 자연 접촉은 뇌의 전두엽을 활성화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유의미하게 낮춘다.

 

둘째, ‘돌봄의 역전’을 통한 자아존중감의 회복이다. 사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머물기 쉬운 취약 계층이 농장에서는 생명을 기르는 ‘주체’가 된다. 내가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드는 식물을 보며 책임감을 느끼고, 수확의 기쁨을 통해 자기효능감을 얻는 과정은 그 어떤 심리 상담보다 강력한 내적 치유를 이끌어낸다.

 

셋째, 자연의 질서와 순환을 통한 정서적 안정이다. 켈러트는 자연의 불규칙하면서도 질서 있는 구조, 즉 ‘프랙탈’ 패턴이 인간에게 깊은 휴식과 집중력을 준다고 보았다.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작물의 생애를 지켜보며 인간은 삶과 죽음, 상실과 회복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수용하게 된다.

 

이미 네덜란드와 영국 등 농업 선진국에서는 치유농업(Care Farming)이 ‘녹색 처방전’의 일환으로 의료 및 복지 체계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우리나라도 관련 법률 시행 이후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일회성 체험이나 관광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치유농업이 진정한 사회적 처방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스티븐 켈러트가 강조한 바이오필리아의 본질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농장을 단순한 작업장이 아닌, 인간과 자연이 교감하는 ‘바이오필릭(Biophilic)’ 공간으로 조성하고, 대상자의 심리적 상태에 맞춘 정교한 프로그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스티븐 켈러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온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역설했다. 농업은 이제 배고픔을 해결하는 수단을 넘어, 현대인의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복지로서 재정의되어야 한다. 우리 안의 본능적인 생명 사랑을 깨우는 치유농업의 확산은 더 건강하고 따뜻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가장 정직한 투자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최연우. 2025. 치유농업과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 이론.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12.21.).

최연우. 2025. 치유농업의 구조적 회복: 디시와 라이언의 자기결정이론.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12.20.).

0
기사수정

기사의 무단 전제나 복제를 금합니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jnnews.co.kr/news/view.php?idx=418919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연분홍 물결의 향연’ 보성군, 제22회 일림산 철쭉문화행사 성황
  •  기사 이미지 관방제림서 뗏목 타고 대나무 목마 즐기고… 담양대나무축제 ‘북적’
  •  기사 이미지 5월 2일 토요일 개최된 제21회 보성녹차마라톤대회
전남오픈마켓 메인 왼쪽 2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