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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비의 애착이론과 치유농업의 정서적 의미 - 전주기전대학 치유농업과 최연우 교수
  • 기사등록 2025-10-21 0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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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심리학자 존 볼비(John Bowlby, 1907~1990)는 인간의 정서적 발달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의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이후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면서 아이들이 부모와 맺는 관계가 평생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

 

어린 시절 자신 역시 유모에게 길러지고 부모와 정서적 유대가 약했던 경험은 그가 “애착(attachment)”이라는 개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고아와 분리된 아동들을 연구하면서 그는 ‘인간은 타인과의 안정된 정서적 관계를 통해서만 건강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연구는 훗날 전 세계 아동심리와 사회복지, 그리고 정신치료의 기본이 되는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으로 발전하였다.

 

볼비는 인간의 애착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생존 본능의 일부로 보았다. 아기가 부모나 보호자에게 형성하는 안정적 애착은 생존의 안전망이며, 이후의 성격 형성과 대인관계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와 가까이 있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다”고 하였다. 안정적 애착은 세상에 대한 신뢰와 탐색의 용기를 키우고, 불안정한 애착은 평생의 정서적 불안을 남긴다. 볼비의 사상은 단순한 유아심리학의 영역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관계성에 대한 통찰로 확장되었다.

 

이 애착의 개념은 오늘날 치유농업(agro-healing)의 현장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치유농업은 농사와 돌봄을 결합한 활동으로, 사람과 자연이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 정서적 안정과 심리적 회복을 이끌어낸다. 볼비가 말한 애착의 본질이 ‘돌봄과 응답’이라면, 치유농업은 인간이 식물과 흙을 돌보면서 자연으로부터 응답을 받는 경험이다. 이 관계 속에서 사람은 식물의 성장 과정을 통해 ‘관계 맺음의 안정감’을 다시 배우게 된다.

 

특히 어린이와 치매노인에게 이러한 경험은 깊은 심리적 의미를 지닌다. 어린이는 아직 애착의 틀을 형성하는 시기이며, 노인은 이미 형성된 애착관계가 약화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치유농업 프로그램에서 어린이가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며 싹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은, “내가 돌보는 존재가 나를 믿고 자라나는 것”이라는 안정된 관계 경험을 만들어준다.

 

이는 볼비가 말한 안정적 애착의 핵심, 즉 상호적 신뢰와 예측 가능한 응답성의 경험이다. 반대로 치매노인은 잊혀진 관계 속에서 식물과의 돌봄을 통해 다시금 정서적 유대감을 회복한다. 식물은 말을 하지 않지만, 느린 성장의 리듬으로 응답한다. 그 침묵의 응답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안정적인 정서적 신호가 된다.

 

애착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치유농업의 현장은 새로운 ‘애착 공간(attachment space)’이다. 이곳에서는 사람과 식물,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서로 돌보는 관계로 얽혀 있다. 식물은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인간은 식물의 생장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햇빛을 조절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관심을 표현하고 돌봄을 제공하는” 애착 행동이다. 흙은 그 행위를 받아들이는 안정적 배경, 즉 볼비가 말한 ‘안전기지(secure base)’의 역할을 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점점 단절되고 있다. 온라인 네트워크는 사람을 연결하지만, 정서적 유대는 오히려 약해졌다. 볼비의 이론에 따르면, 애착의 결핍은 불안과 우울,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낳는다. 이러한 시대에 치유농업은 인간이 다시 “안정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천이다. 식물은 성급하지 않고, 조건을 따지지 않으며, 꾸준히 돌봄에 응답한다. 자연의 세계에는 인간관계에서 사라진 예측 가능한 신뢰감이 존재한다. 그 신뢰감이 사람에게 심리적 안전감을 주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유치원 원예치료 프로그램에서 아이가 식물을 키우며 느끼는 책임감, 또는 치매노인이 텃밭을 가꾸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은 모두 애착의 회복 과정이다. 식물은 인간에게 “너는 여전히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준다. 이는 곧 자존감의 회복이자, 세상과의 관계를 다시 열어주는 문이다.

 

존 볼비의 애착이론은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치유된다”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치유농업은 그 관계의 대상을 사람에서 자연으로 확장한 형태다. 씨앗을 심고 싹을 기다리는 시간, 물을 주고 햇살을 맞이하는 행위는 단순한 농사일이 아니라 마음의 대화다. 식물을 돌보는 손길은 결국 자기 자신을 돌보는 손길이 된다.

 

볼비가 남긴 이론이 인간 내면의 상처를 해석하는 언어라면, 치유농업은 그것을 흙의 언어로 실천하는 장이다. 사람은 흙을 통해 다시 관계를 배우고, 식물을 통해 다시 신뢰를 느낀다. 볼비가 그토록 강조했던 안정된 애착의 힘은 결국 자연 속에서 다시 피어난다. 흙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돌봄이 서로에게 안전기지가 될 때, 비로소 치유는 완성된다.

 

참고문헌

최연우. 2025. 인간의 본능과 치유농업, 에드워드 윌슨의 생물친화가설.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10.10.)

최연우. 2025. 마틴 셀리그먼의 긍정심리학과 치유농업.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10.2.)

최연우. 2025. 알버트 반두라의 자기효능감 이론과 치유농업.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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