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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복내면 다슬기 수제비와 마음의 치유 - 농업 칼럼니스트 농학박사 허북구
  • 기사등록 2025-10-18 08: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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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최근 보성군 복내면을 들릴 일이 있었다. 들녘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시골길 옆으론 억새가 바람에 흔들렸다. 한적한 마을 풍경을 따라 점심을 해결할 곳을 찾던 중, 지인의 소개로 다슬기 전문 식당에 들르게 되었다. 면소재지의 작은 마을이기에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의외로 식당 안은 꽉 차 있었다. 시골답지 않게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이 오히려 반가웠다.

 

주문한 다슬기 수제비가 나오자, 뽀얗게 우러난 국물 위로 보성의 들과 계곡 냄새가 풍겨왔다. 국물은 진하면서도 맑았고, 수제비 반죽은 투박하게 손으로 뜯은 듯 정감이 있었다. 인근 하천에서 잡은 다슬기를 마을 어르신들이 손질해 식당에 납품한다고 했다. 지역의 생태자원이 마을의 경제와 연결되어 돌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 고향에는 90세가 넘은 어머니가 계신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자식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손수 만들어주셨다. 그중에서도 다슬기 수제비는 어린 날의 큰 즐거움이었다. 하천에서 어머니와 함께 다슬기를 잡던 여름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냇가에서 손끝으로 다슬기를 잡아 바구니에 담고, 집으로 돌아와 다슬기 육수에 수제비 반죽을 뜯어 넣던 어머니의 모습—그 따뜻한 손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보성군 복내면의 다슬기 수제비 한 그릇은 그렇게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노쇠하셨지만, 그 시절의 맛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이 살아 있었다. 음식이란 결국 기억의 매개체다. 다슬기의 구수한 향과 미묘한 쌉쌀함, 수제비의 부드러운 질감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시간’을 다시 만났다. 그날의 점심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라,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함께 간 일행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 또한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던 다슬기 수제비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출신 지역은 달라도, 남도 사람들에게 다슬기 수제비는 공통의 추억이자 위안이었다. 한 일행은 국물을 떠먹으며 말했다. “이 국물 맛은 마치 쇼팽의 녹턴처럼 마음을 차분하게 해줘요.”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쇼팽의 〈Nocturne Op.9 No.2〉은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인 그 선율은 마치 다슬기 수제비의 국물처럼 부드럽고, 먹는 이를 천천히 감싸안는다. 삶에 지친 하루 끝, 그 음악을 들으며 다슬기 수제비 한 그릇을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잠시 평화를 느낄 것이다.

 

음식과 음악은 모두 ‘감정의 언어’다. 그 둘은 기억과 감각을 자극하며 인간의 내면을 어루만진다.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음식이 우리의 영혼을 다독이듯, 음악 또한 마음의 상처를 봉합한다. 그래서 남도 사람들에게 음식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삶의 노래요, 그리움의 선율이다. 시대는 변하고, 입맛도 달라졌지만, 남도 땅에서 자라난 식재료로 만든 음식에는 여전히 ‘정’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보성의 다슬기 수제비처럼 지역의 자연과 손맛이 어우러진 음식은 사라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런 전통 음식이야말로 시대를 넘어설 힘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농촌이 단지 생산의 공간이 아니라 치유와 감성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듯, 지역 음식도 그 뿌리를 지키면서 새롭게 발전할 수 있다. 다슬기를 손질하던 마을 어르신들의 정성, 그것을 받쳐주는 지역 식당의 운영, 그리고 그 음식을 통해 마음을 치유받는 손님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순환 구조를 이룬다.

 

앞으로는 이런 전통 음식의 가치를 단순한 향토 음식의 차원을 넘어 ‘치유의 음식’으로 확장해야 한다. 전통 식재의 보존, 요리기술의 계승, 지역 공동체의 참여가 함께 어우러질 때, 남도 음식은 진정한 문화자산이 된다.

 

보성군 복내면의 다슬기 수제비는 그저 한 그릇의 시골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억이자, 삶의 위로이며, 고향의 노래다. 쇼팽의 녹턴처럼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지닌 그 맛이야말로, 현대의 빠른 시간속에서 잃어버린 ‘느림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준다. 그날의 점심은 결국 ‘맛’보다 ‘마음’을 먹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내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잔잔히 울리고 있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나주 곰탕의 풍미와 수묵화의 여운.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4).

허북구. 2025. 나주 곰탕, 영화 시네마 천국을 닮은 맛.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3).

허북구. 2025. 나주 곰탕의 풍미와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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