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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어젓과 어버이날의 한식 밥상 - 남도치유한식연구회 회장 장영애
  • 기사등록 2025-05-07 09: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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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문득 떠오르는 냄새가 있다. 연탄불에 밥 짓던 시절,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솥밥 위로 피어오르던 뜨거운 김, 그리고 그 사이로 스며 나오던 황석어젓의 향기. 그때는 냉장고도 흔치 않았고, 불 조절은 감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연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솥 뚜껑을 살짝 열어 김이 오르는 걸 지켜보던 엄마의 모습은 이제 사진 속의 추억이 되었다.

 

엄마는 밥이 어느 정도 익을 즈음, 황석어젓을 살짝 양념해 밥 위에 조심스레 올리셨다. 찜하듯 익혀낸 그 젓갈은 짜지 않고 감칠맛이 깊어 쌀밥과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엄마의 거칠지만 따뜻한 손으로 황석어젓갈을 찢어 뜨끈한 밥 한 숟갈 위에 올려주시면,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금도 가끔 황석어젓 냄새를 맡으면, 어린 시절 온 집안에 퍼지던 그 향이 떠오른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배고픔의 신호였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는 가슴 한켠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치유의 향기’로 남았다.

 

황석어젓은 황석어라는 작은 바닷물고기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이다. 비리지 않고 단단한 살결 덕분에 밥과 궁합이 좋아 예부터 '밥도둑'이라 불렸다. 하지만 그저 맛있는 반찬이 아니라, 그것은 어머니의 손맛과 기다림이 깃든 음식이었다. 손질하고 간을 맞춘 뒤, 날마다 정성껏 살펴가며 익혀야 했던 젓갈. 그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한 끼의 밥상에 담겼다.

 

그 시절엔 외식이 흔치 않았고, 집밥이 최고의 음식이었다. 장을 보고 돌아온 어머니가 황석어젓갈을 사 오면, 그날 저녁 온 가족은 말없이 밥상 앞에 둘러앉았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질 때, 우리는 그저 배를 채운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수고를 삼키고, 가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요즘 ‘치유음식’이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슈퍼푸드, 항산화 성분 등 현대적인 개념이 넘쳐나지만, 정작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건 어린 시절 먹던 단출한 집밥 한 끼일지도 모른다. 특히 한식은 ‘시간이 만드는 음식’이다. 오래 삭히고, 천천히 끓이며, 발효를 거쳐야 제맛이 나는 한식은 그 시간 속에서 재료를 변화시키고, 먹는 이의 몸과 마음까지 조용히 바꿔 놓는다.

 

황석어젓도 마찬가지다. 낯선 이에게는 짜고 강한 향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 냄새로 배를 곯던 기억이 있는 이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치유의 미각’이 된다. 한식은 이렇게 맛과 향, 그리고 기억을 통해 마음까지 보듬는 음식이다. 그것은 단순한 포만감을 넘어, 지난 시간을 따스하게 껴안아 주는 위로다.

 

어버이날, 붉은 카네이션 한 송이도 좋지만, 오랜만에 부모님을 위해 집밥을 차려보는 건 어떨까. 번듯한 음식이 아니어도 된다. 된장찌개 한 그릇, 잘 익은 김치, 황석어젓 한 조각과 뜨끈한 쌀밥 한 공기. 이것은 어릴 적 우리가 받았던 사랑을 다시 건네는 일이자,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사를 전하는 손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밥상 위에는 오롯이 ‘기억’이 놓인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손길, 아버지의 말 없는 응원이 밥상 위에서 되살아난다. 음식을 먹는 일이 곧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식이 지닌 힘이며, 어버이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가슴 따뜻한 의미다.

 

이제는 연탄불 대신 인덕션을 쓰고, 황석어젓보다 수입 조미료가 더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밥을 짓고, 반찬을 고르고, 식구를 챙기는 이유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식탁 위에서 가장 깊고 따뜻하게 전해진다.

 

올해 어버이날, 당신의 식탁에는 어떤 기억이 올라올까? 당신의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밥상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질 한 끼를 준비해보자. 그것이야말로 진짜 ‘효도’이고, 한식이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치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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