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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 생명의 빛살을 담는 그릇
  • 기사등록 2010-06-12 14: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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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때 제주에 추쇄 경차관으로 왔던 최부(崔溥, 1454-1504)는 탐라시(耽羅詩) 35절을 남겼는데 그 중 28절의 시에서는 허벅을 등에 지고 물 길러가는 제주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지 않고 등에 지고 가는 것이 퍽 신기해 보였던 것이다.

負甁村婦汲泉去 허벅 지고 촌아낙은 물 길러 가버리고
橫笛堤兒牧馬歸 피리 불며 아이 데리고 말테우리는 돌아오네

육지부에는 당연히 마을 안에 우물이 있었고 길에는 돌멩이가 그다지 없어 평탄했으므로 여인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걸어 다니기에 그리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예전, 제주의 길은 온통 자갈 투성이었다. 게다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억센 바람이 불어서 제 한 몸 가누며 걷기도 힘든 형편일 때가 많았다.

제주에는 마을 안에 우물이 없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썰물이 빠져나간 바닷가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산간마을은 돌투성이의 냇가에 고인 빗물을 길어다 사용했다. 이러한 가혹한 자연환경에서 어렵게 구한 물을 한 방울이라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한 지혜로 허벅을 안전하게 물구덕이라는 대바구니에 넣어 등에 지고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 허벅은 항상 부엌입구에 있는 물팡에 물구덕 안에 놓아둔다. 밭이나 바다에서 돌아와 재빨리 물 길러 갈 수 있게 항상 준비해 놓는다.

허벅은 옹기로 만들어진 물 긷는 용기이다. 허벅으로 물을 긷는 일은 전통적으로 제주여성 고유의 일이었다. 물은 인간생명의 제일요소이다. 세계의 어느 지역을 가든 물을 긷는 일은 여성의 몫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물의 생명성과 여성성을 동일시한데서 오는 인식에 다름 아니다.

제주도에는 신석기유적을 대표하는 고산리 출토 토기에서부터 청동기인 상모리토기, 철기시대인 삼양동토기와 곽지리식토기,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종달리토기, 용담동제사유적토기, 고내리식토기까지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들어내는 오랜 토기·도기 전통이 존재해왔다. 이러한 도기문화가 허벅을 만들어낸 밑바탕이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근대의 옹기는 처음에 흑도에 가까운 무문옹기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 검은색에 가까운 유문옹기가 등장했다고 하는데 제주도의 경우 기와를 구워내던 와요[瓦窯]를 ‘검은굴’이라 했다. 여기에서 생산된 기물에는 ‘지새[기와]’라는 명칭이 붙는다. 예를 들면 지새허벅 지새항 지새시루 지새화로 등이다.

지새그릇은 900도 내외에서 소성되며 그릇의 빛깔은 흑회색이다. 이와는 달리 1,000도가 넘는 고온으로 구워지는 옹기가마를 ‘노랑굴’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생산되는 옹기들의 빛깔이 밝아서 붙여진 속칭이었다.

허벅은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인문적 배경에서 발생된 특유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물을 가득 담은 채 운반하기 위해서 배는 부르고 목은 좁게 만들어졌다. 부리 또한 손을 대 들어올릴 정도로 좁다. 이러한 형태로 완성되기까지의 고찰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미 완성된 형태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벅은 철분이 많은 제주도의 화산회토 영향으로 몸체가 유난히 붉은색을 띤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냈으나 땔감으로 사용하는 나무의 진액으로 자연유가 형성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또한 선사시대의 토기에서나 볼 수 있는 빗살무늬가 전체에 장식되고 있어 허벅의 고유한 문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주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도 습도가 높고 강우량이 많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의 광도(光度)는 유난히 밝고 강렬하다. 그래서 겨울에도 나뭇잎들은 참기름을 바른 듯 초록빛으로 반들거리고 땅에는 얼음이 박히지 않는다.

제주의 허벅에 잔뜩 새겨있는 저 빗살무늬! 그건 강한 생명의 빛살을 상징한다, 단순한 물이 아니라 어기찬 생명력을 담고 싶어 하는 제주여인들의 염원이다.

그러나 허벅에는 까다로운 금기가 있었다. 빈 허벅을 등에 지고 남을 앞질러 가서도 안 되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도 안 되었다. 특히 아침녘에 남성이 외출을 나가다가 빈 허벅을 진 여인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물이 담기지 않은 빈 허벅은 생명력 부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 허벅장단을 치며 민요를 부르는 제주여인들.
허벅은 물 긷는 용도 외에도 각종 곡물씨앗의 보관, 술이나 간장 등의 액체를 보관하는 용기로도 사용되었다. 사돈집이나 친척집이 상(喪)을 당하였을 때에는 팥죽을 쑤어서 담아갔으며 혼례식 등의 여흥에서는 숟가락으로 어깨부분을 쳐서 흥겹게 장단을 맞추는 악기의 역할도 하였다.

속에 담긴 물의 양에 따라 그 음색(音色)을 달리하는 허벅장단이야말로 제주의 특색을 담은 소리라 하겠다. 이렇듯 제주의 허벅에는 제주의 빛깔과 소리, 제주의 삶이 담겨 있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치면서 수도가 설비되고 플라스틱 그릇에 밀려 옹기가마들은 모두 문을 닫으면서 허벅은 급속히 사라져갔다. 제주도는 지난 2001년 허벅을 제주문화의 특성이 잘 나타나있고 그 기술을 보존 전승할 가치가 있다고 하여 무형문화재 제14호 '제주도 허벅장'을 지정하였다.

허벅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생명의 빛살을 담던 그릇이었다. 전승에 있어 허벅의 형태만을 빚어내는데 그치지 말고 한 방울의 물도 소중히 하던 마음까지도 이어지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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