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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대중 전 대통령 걸어온길
  • 기사등록 2009-08-18 22: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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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전라남도 신안(新安) 출생.

1943년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목포일보·목포해운 사장 등을 거쳐 1960년 강원도 인제(麟蹄) 보궐선거에서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무대에 진출, 제6·7·8·13·14대 국회의원,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평민당·신민당 총재, 민주당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 낙선한 뒤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전개하다가 1973년 도쿄[東京(동경)]에서 <김대중납치사건>을 겪고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 1980년에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미국에 망명, 1985년 귀국에 이어 해금된 그는 1987년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金泳三)과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재차 낙선하였다.

민주화세력 분열로 인한 군부정권 종직 실패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1991년 재야세력을 규합, 신민당을 창당하고 민주당과 합당, 이기택(李基澤)과 공동대표위원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세번째 출마하여 호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통합여당인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94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설립, 1995년 정계은퇴선언을 번복, 지지세력을 이끌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종필(金鍾泌)의 자유민주연합과 의원내각제를 전제로 연대하여 총 투표수의 약 41%를 득표, 39%를 얻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40만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한국 헌정사상 첫 여야(與野) 정권교체의 주역이 되었다.

3차례에 걸친 대권도전 실패와 투옥·망명 등 숱한 시련 끝에 1998년 2월 대통령이 되었으나 지역감정 해소라는 해묵은 과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당선과 동시에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자금지원을 받는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정권을 인수,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동시추구를 지표로 국정활동을 펼쳤다.

2000년 6월 13일부터 3일간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이산가족 재회와 통일 방향을 다지는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했다.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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