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 당시 ‘간우회’ 회원을 모아 독립만세를 주도하고, 중국 이주 후 국내인사들과의 연락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국내에 돌아와서는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주) 폭파 의거 당시 사전에 위치를 안내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던 박자혜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난 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다. 졸업 후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1919년, 간호부 근무 당시 3·1만세 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선생도 직접 3·1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고,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났으며, 이후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한 선생은 북경생활 1년여를 지낸 1920년 봄, 평생의 반려자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이듬해 첫 아들 수범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1922년 둘째를 임신한 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남편과 헤어져 국내로 들어오고 말았다.
한편 신채호 선생은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고, 박자혜 선생도 남편 신채호와의 연락을 계속하면서 국내에서 가능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당시에도 서울의 길 안내를 지원한 것이 박자혜 선생이었다. 또한 신채호선생이 체포 되어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운명을 달리하기까지 옥바라지는 물론 자녀 교육, 생계를 모두 떠맡아야만 했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둘째 아들 두범 마저 어린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선생은 유일한 희망인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의 회한을 뒤로하고 1943년 10월 16일 병고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여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