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과 철석 같이 믿었던 동지들에 의하여 인간으로서 소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였던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아닐 수 없었다.
치우천왕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 ‘구려’였는데 오와 월은 하나의 동족으로 구려에 속하는 여러 고을 중 하나의 읍락으로 이웃에 살아가다가 서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철천지의 원한을 품은 적대국이 되었다.
와중에 오의 재상인 오자서는 온갖 재능을 겸비한 선비였지만 스스로의 인생역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피 눈물로 점철된 한 맺힌 원한의 연속 이었다.
오자서는 원래 초나라의 명문 귀족의 집안으로 초 장왕을 직언으로 힘들게 하였던 오거의 후손으로 오사의 둘째 아들이었다.
오사는 초평왕 태자 건의 스승으로 태부의 직에 임명 받고 비무기는 보좌역인 소부로 근무를 하였는데 성품이 간악하고 잔인한데다 충성심이 없어 자신의 출세에만 눈이 뒤집혀 있었다.
태자 건이 15세가 되던 해 진나라의 여인을 태자비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비무기가 영접을 나간사이 태자비가 절세가인이라 급히 되돌아와 미인을 좋아하는 초평왕의 환심을 사려고 “대왕께서 직접 비로 맞이하시고 태자에게는 다른 여자를 구해주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고 하였다.
비무기의 간언을 받아들여 진나라 여인을 비로 맞이하여 아들까지 낳은 초평왕에게 후환이 두려운 비무기는 태자 건을 모함하여 변경으로 쫒아낸 것도 모자라, 태자비 사건을 빌미로 태자는 반란을 일으키려 준비를 하고 있다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초평왕이 오사를 비밀히 불러 태자가 변심을 한 것이 사실인지를 묻자 강직한 오사는 “혼자 비방하는 간신배의 말만 믿고 골육의 정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고 직간 하였다.
역사의 강물을 그릇된 곳으로 인도하는 간신배의 집념은 산과 강둑을 뒤엎는 집요함으로 골육의 상쟁에 불을 붙여 초평왕으로 하여금 태자에게 오히려 붙잡힐 수 있으니 태자를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왕의 엄명을 받은 사마분양은 궁여지책으로 태자에게 사람을 보내 급히 피하도록 연락을 하자 태자는 송나라에 망명하여 일신을 의탁 하였다.
간신배는 그것도 부족하여 훗날의 안위를 위하여 강직한 오사와 함께 두 아들을 제거할 계략을 세워 초평왕으로 하여금 오사를 붙잡아 “두 아들을 불러들이면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고 하였다.
오사가 이르기를 “큰아들 오상은 청렴하고 절개가 있으며 효심이 깊으니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올 것이지만 오자서는 지혜롭고 용맹하여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오상은 아버지를 위하여 같이 죽을 것을 각오하였지만 오자서는 차라리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복수할 것을 다짐하며 피 눈물을 삼키며 태자 건이 있는 송나라로 일신을 피하였다.
송나라에 가서 태자 건을 어렵사리 만났으나 곧바로 화씨의 난으로 또다시 정나라로 몸을 의탁하였다가 여의치 않아 진나라로 건너갔는데, 진경공이 합세하여 정나라를 도모하자고 자꾸만 꼬이는 바람에 정처가 없었던 태자는 어쩔 수 없이 동조하였다.
정나라로 되돌아간 태자가 우연한 기회에 거느린 몸종과의 갈등이 있어 정나라에 반역의 사실을 밀고하는 바람에 태자의 목숨은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오자서는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오나라를 향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쳐 국경에 이르렀는데, 앞에는 강물이요 뒤에는 추격 병이 따라오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장강의 한 어부가 나타나 그를 태워 오나라 땅에 내려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기구한 목숨을 부지한 오자서는 백금의 칼로 보답하려 건넸지만 어부는 “초나라에서는 오자서의 목에 5만석의 곡식과 벼슬을 현상금으로 걸었기에 어찌 백금의 칼이 문제가 되겠느냐”고 일거에 거절하였다.
하늘이 오자서의 원한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부를 보내어 목숨을 구했는지는 몰라도 병마를 이겨내고 걸식을 하면서도 오나라의 수도에 가까스로 도착하여 태자 광(합려)의 빈객이 되었다.
오나라 왕 수몽에게는 제번(합려의 부), 여제, 여매, 계찰 등 네 아들이 있었으나 막내인 계찰의 인품과 재능이 뛰어나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간곡히 사양하여 나중에는 백성들까지 나서 간하였음에도 아예 집을 떠나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기원전 561년 수몽이 죽자 할 수 없이 제번이 왕위에 올랐다가 초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중 기원전 548년 화살을 맞고 전사하면서 다음 보위를 형제에게 상속하도록 유언을 하였다.
둘째인 여제가 왕위에 올랐다가 물러나고 섯째인 여매가 즉위하였으나 전쟁터에서 죽으니, 드디어 계찰의 차례가 되었음에도 아예 종적을 감추어 물리치므로 계찰의 아들인 요가 기원전 526년 왕위에 올랐다.
요의 등극에 불만인 한 사람이 있었으니 장자의 아들인 태자 광(합려)으로 자신이 오르지 못한 왕위를 틈만 나면 되찾으려 혈안이 된 것을 안 오자서는 급기야 자객인 전제를 태자에게 소개하여 기원전 514년 태자 광이 요왕과 문무백관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어 생선에 감추었던 비수로 전제가 요왕을 찔러 암살토록 하였다.
주변을 정리한 태자 광은 드디어 오나라 합려 왕으로 등극하였으며 오자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중용 되어 초나라에 복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합려는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삼촌 계찰의 지지를 끌어내고 오자서를 중용하였는데, 원래는 제나라 사람으로 내란을 피하여 오나라에 망명한 손무가 13권에 달하는 손자병법을 완성하자 오자서는 이를 합려 왕에게 천거하여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 무렵 초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극완과 백주리가 주살을 당하였고 백주리의 손자인 백비가 오나라로 망명해 온 것을 자신과 같은 딱한 처지라 천거하여 대부로 삼아 이후 3년간 내정과 경제를 안정시켜 오나라의 군대는 날로 강성하였다.
기원전 511년경 오의 합려는 손무를 군사로 오자서와 백비를 거느리고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와 다섯 번에 결쳐 대 접전을 벌여 5전승으로 초나라의 수도 영을 기필코 점령하였다.
초나라에 입성한 오자서는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채찍으로 300번 매질을 하여 아버지와 형의 사무친 원수를 갚았다.
적으로 돌아선 친구인 초나라의 신포서가 그 소식을 듣고 오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가혹한 복수를 책망하자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이 때문에 천리를 따르지 않고 역행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반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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