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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소와 새끼소
  • 기사등록 2013-03-28 13: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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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초등학교도 입학하지 못하였던 1962년도로 기억을 하는데 그해 초봄에 집안 사정으로 읍내에서 무려 십리길이나 떨어진 그야말로 외딴 시골집으로 이사를 가서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일곱 식구가 부엌 한 칸, 방 한 칸, 창고 한 칸으로 이루어진 초가집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대나무 평상이 놓여 있는 마루 밑에는 곡식을 저장할 수 있도록 파 놓은 상당히 깊은 토굴과 예전에 살던 사람이 키우다 두고 간 거위 두 마리도 있었습니다.

마당 앞쪽에는 드넓은 저수지가 길게 펼쳐져 있었으며, 왼쪽으로는 두마지기 정도 되는 논이 있고, 부엌 옆에는 후손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의 산소가 있었습니다.

뒤편으로는 약 3,000평정도 되는 과수원과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던 밭들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와 고등학교 진학길이 막혀버린 큰누나가 날마다 눈물 흘리며 땀방울을 쏟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이사 짐을 풀던 날, 난생 처음 대하는 거위로부터 약간의 위협을 느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동안 갑자기 고개를 땅에 숙이고 공격 자세를 취하고 달려드는 녀석으로부터 도망을 가다 여지없이 머리를 강타당하고 넘어져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로부터 고단한 삶의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이후 항상 막대기를 들고 달려드는 녀석을 후려쳐 쫒아내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낯이 익어가는 동안 냉전의 상태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었습니다.

아마 우리들의 관계가 계속하여 극적인 앙숙으로 발전을 하였다면 그 거위는 솥단지 안으로 들어갔거나 다른 집으로 팔려갔을지도 모르는데 상당기간 우리들과의 인연을 통하여, 외딴집에서 다른 사람의 내방이 있을 경우 고개 마루 너머에서도 들릴 정도의 독특한 울음소리를 내며 훌륭한 파수꾼 노릇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암수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매일같이 평상 밑에서 내 주먹보다 훨씬 더 큰 알을 낳는 산고의 아픔을 반복 하였는데, 이따금 신비스런 탄생의 장면을 훔쳐보면서 야릇한 충동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방문을 나서면 과수에 뿌릴 농약을 물과 배합하는 시멘트 구조물이 있었으며, 나무로 얼기설기 못질한 돼지 막에서는 세상을 모르는 듯이 꿀꿀거리는 흑돼지 한 마리가 날마다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잠간이라도 돌려 과수원 쪽을 향하다보면 무의식 중 눈앞에 들어오는 산소의 모습으로 어린 나이에 삶과 죽음의 상념에 대한 깊은 회의를 끊임없이 되새겨 보기도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존해가는 형국이었는데, 마치 선계와 인간계가 지척에 엉켜 있는 현상을 실물로 비추어 보여주었던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저수지에는 매일 같이 다른 사람이 찾아와 낚시 대를 드리우는가 하면, 이따금 한사람만이 탈수 있는 배를 띄워 긴 대나무 막대에 쇠갈고리를 달아 바닥을 긁어 대면서 장어를 잡던 아저씨들의 기막힌 재주가 부럽게 느껴졌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갑니다.

아버님이 항상 애지중지 하시던 톱을 들고 과수원을 배회하다 보면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꽃뱀을 보고 정의의 날을 곧추 세워 인정사정없이 처단을 하고, 배나무에 나무 등걸인 것처럼 붙어 염화시중의 노래를 불러대던 매미를 잡아 보기도 하고, 이제 막 날개 짓을 가르치려고 어미가 복숭아 나무에 물어다 놓은 새끼 새들을 잡아다가 바구니에 덮어놓고 메뚜기, 여치 등을 먹여 키워보려고 애쓰다 끝내는 제 명을 못 채우고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봄이 되면 집집마다 처마 끝에 제비가 찾아와서 흙집을 짓고 새끼를 키우기도 하였는데, 우리 집 처마에도 어김없이 제비가 새끼를 치는데, 어미가 날아드는 날개 소리에 눈도 채 뜨지 못한 새끼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누런 테두리의 주둥이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년이 되어가면서 번갈아 날개 짓을 하던 제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둥지를 떠나 비행 연습을 마치고는 잠간동안 집에 들렀다가 어미들과 함께 영영 떠나가 버렸는데, 빈 둥지만 하염없이 쳐다보던 허전함은 지금도 가슴 한 켠 쓰라린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의식이 충분하도록 성장하지 못하였던 어린 시절에 마주하였던 생명의 시작과 끝, 인간의 삶에 대한 확고한 종착점을 늘 옆에 두고 살면서도, 어미와 자식 간에 이루어지는 온갖 생명들의 교감들을 가슴속 깊이 새기면서 자식을 위하여 헌신하는 존재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감명 깊게 지켜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듬해 여덟살이 되면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 십리길이나 되는 통학거리를 다섯 살이나 많은 작은 누나와 같이 보폭을 맞추어 다니는 여정은 상당히 힘겨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항상 가슴은 앞쪽으로 치우치고 다리는 뒤를 따라가는 형국의 보행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절 지루한 등하교 길을 달래주는 것은 친구들이나 선배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림자 밟기나 술래잡기 등의 놀이를 통하여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매달려 등하교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기도 하고, 길가의 무밭에서 무를 뽑아 목을 축이기도 하고, 어른들의 눈을 피하여 고구마 밭에서 밑이 덜든 고구마를 캐서 옷이나 책가방에 문질러 그대로 삼키는데 그야말로 꿀맛인 것입니다.

어느 날 이제 막 출산을 한 것으로 보이는 어미 소가 쟁기로 밭을 가는데 울퉁불퉁한 밭이랑 사이를 갓 태어난 새끼소가, 힘겹게 쟁기를 끌고 가는 어미 소를 할일도 없이 비틀거리며 이리 저리 따라다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앞질러 가버리고 없는 황톳길에서 깊고 무거운 멍에를 진 채, 길고 긴 이랑을 힘들게 갈아엎고 있는 어미 소도 안 쓰럽게 보이고, 만연히 따라다니는 새끼소도 안쓰러워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하염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은 앞서는데 어린 저로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도와줄 길이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채찍을 휘두르는 농부에게도 물론 고충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힘이 좋은 황소로 하여금 밭을 갈도록 하지 않는 농부가 원망스럽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자식을 돌보아야 하는 순간에 밭을 갈아야 하는 어미 소의 고뇌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여 지지만, 새끼소도 또한 이 세상에 오로지 어미의 품이 아니면 의지할 때가 없기에 기를 쓰고 따라 다닐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농부는 제 때에 파종을 서둘러야 하기에 어미 소와 새끼소의 사정을 이해함에도 무리를 하여 밭을 갈아야 하는 딜레마가 은연중 충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미래의 풍요를 그리며 지금은 고달픈 순간을 이겨내고 땀방울을 쏟아내는 힘겨운 시점인 것입니다.

그 사이 배가 고픈 새끼소는 힘든 발걸음의 어미 소를 아랑곳 하지 않고 젖꼭지에 고개를 들이밀어 젖을 달라고 보채고 있습니다.

어미 소는 정말로 힘든 상황이지만 아낌없이 자신의 피와 살의 결정체를 새끼소에게 주려고 발걸음도 조심스레 밭을 갈면서 자신의 소중한 젖꼭지를 아낌없이 내어 놓습니다.

지겹도록 무더운 여름날로 기억을 하는데 마음속으로는 어미 소와 새끼소를 응원하면서 한시라도 빨리 긴 이랑을 갈아 고행이 끝나기를 고대하는 사이, 해가 서산에 걸릴 때까지 귀가시간이 지체되면서 정작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였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핸드폰도 없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던 시절 갓 여덟살의 어린 자식이 귀가 시간을 훨씬 넘겨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어미와 아비의 심정이 어떠하였을 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매어오는 것입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 영암 월출산에 있던 용암사를 찾아 무려 12일 동안을 지내면서도 깜박 잊고 가족들에게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 당시 부모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해보면서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매달려 있었던가를 돌아다보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다시금 되새겨 보면 아마 그 당시의 어미 소와 새끼소는 잠시 동안 천륜의 단맛을 느끼다 새끼소가 다른 집으로 팔려가는 이별의 아픔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어미소는 충혈된 눈과 애타는 목소리로 새끼소를 불러대고 새끼소는 어미 소를 떠나기 싫다고 몸부림하며 발버둥쳐 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도 입안에 있던 사탕을 빼어 자식에게 주기도 하고, 일터에서 간식으로 나오는 음식을 주머니에 담고 맹물로 배를 채우기도 하고, 이빨이 약한 자식에게 오징어를 씹어서 먹여주는 부모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이 세상 한세대와 다음세대의 인연이 쌓이고 쌓여, 길고도 긴 인간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 산재하는 갈등과 대립의 현상들이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하여 마침내는 어미와 새끼가 대립하는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형국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으로 인한 불상사가 자주 등장하고, 경로우대 사상을 비웃고, 냉정하게 기성세대를 내치는 풍조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조그만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어미와 자식 간의 갈등 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알력을 조장하여 천륜의 벽을 무너뜨리거나 흔들어대는 자가 있다면, 이승에서의 수업을 마치는 동안 머지않아 하늘의 준엄한 심판을 면하지 못하고 지옥 불에 떨어져 신음하는 날이 기필코 닥치게 된다는 사실을 가슴속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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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견(총 1 개)
  • ksh72262013-04-22 09:26:58

    박영동님의 글을 계속 읽고 있는 독자 입니다. 글에 굶주리게 하지 마시옵소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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