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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와 백로
  • 기사등록 2012-06-28 1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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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조상들은 사람의 생명이 다하여 장사를 지내게 되면 큰새의 날개를 준비해 두었다가 소중하게 같이 묻어 주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애초부터 날개가 없어 무한한 공간을 유영하고 싶었던 소망이 강렬하였음에도 생전에는 이루지 못하였던 아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의식의 저변에는 생을 마감한 뒤의 혼령은 결국에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갈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때 원초적으로 없었던 커다란 새의 날개를 빌려 쉽게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서 평안하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깃발에도 황금색의 삼족오가 등장하고 있는데, 물론 가상의 새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태양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선조들은 신의 뜻을 전달하는 사자로서 귀한 새로 여겼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티베트의 장례관습에는 노장 사상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까마귀에게 죽은 사람의 육신을 보시하는 행사를 치르는데 사람에게 있어 관념의 차이가 엄청나게 다른 행동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 울음소리나 온몸이 검은 털로 덮여있는 모습이나 떼를 지어 날아들어 약간은 공격적으로 보이는 까마귀의 선입견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에 반하여 긴 목과 다리로 날씬한 몸매를 갖추고 온몸에 하얀 깃털을 달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백로는 참으로 기품이 있어 보이는데, 마치 요사이 팔등신 미인을 연상케 하는 백로의 자태는 누가 뭐라 해도 고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까마귀와 백로의 사이에 아무런 은원 관계가 없을지라도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대비되는 두 존재로부터 우러나는 개념에는 서로 간에 엄청난 괴리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 들/ 속까지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위 시조는 고려 말의 소설가인 이직이라는 사람이 지은 것으로 몇 마디가 아니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성향 차이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것으로 보여 집니다.

까마귀는 겉이 검지만 속까지 검은 것은 아닌데도 백로는 겉이 희다고 우쭐대면서 언뜻 보이지 않는 검은 속으로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가는 세상에 겉으로 보이는 위선의 가면에 백색으로 위장을 하여 온갖 감언이설로 다른 사람을 속여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을 보면 영락없는 백로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백로에게 당한 사람들은 배신감 때문에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갈등으로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한편으로 복수와 응징이라는 극렬한 관념을 가슴에 품거나 은연 중 표출하기도 할 것입니다.

요즈음 일과시간의 이전인 이른 아침이나, 일상이 끝난 이후인 저녁 시간대에 시청자의 눈과 귀를 붙잡는 드라마를 우연찮게 대하다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변칙이 난무하는 현장을 마주하게 됩니다.

잠깐 동안의 줄거리에 빠져들다 보면, 과연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인지 의문이 가면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의 모습을 마치 정상인 것처럼 연출을 하는데 때로는 흥미가 돋기도 하지만 분노가 치밀면서 알지 못하는 허전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만큼 드라마를 연출하는 사람들이나 이를 흥미 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의 의식에는 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의 일상은 이미 관심의 영역에서 멀어져 가고, 보다 자극적이고 극히 비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려야 만이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끝없는 탐욕과 배신으로 상대방을 말살시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인간관계를 설정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인간에 대하여 오히려 손을 들어주는 세태로, 마치 불의가 정의를 조롱하듯이 이어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인간성을 그저 지켜보는 것입니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상식을 깨뜨리는 우연성의 남발과 시청자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공영방송의 분장을 요구하는 상업성의 표출은 어쩌면 인간의 신음소리로 들려 연민과 번민이 동시에 교차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척박해진 이면에는 극도의 이윤만을 강조하는 황금만능주의와 이익이 따르지 않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무료한 것으로 매도하는 경제적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사람의 원한을 끝없이 키워가면서 유발한 긴장감으로, 시청 율 몇 프로였다는 사실을 매일 같이 발표를 하고 경쟁을 멈추지 않은 채, 보도매체를 통하여 얻은 인기를 금전으로 환산하기에도 바쁘게 된 것입니다.

요사이 보도되는 뉴스 등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사건사고로 어둡고 처절하고 쇼킹한 것들로 천륜을 거스르는 세태가 마치 정상인 것처럼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전파를 타고 있습니다.

사람의 천륜을 저버리는 인간상에 대하여 학생들 주입식 교육을 시키듯 하루에도 수십 번도 모자라고, 채널마다 다투어서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양 떠들어 대니, 시청자의 귀에는 이미 못이 박혀 급기야는 지극히 평범한 일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지고 며칠이 못가서 모방 범죄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동안에 남의 집 일로만 보았던 일이 자신들에게 현실로 닥치는 참극이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와중에 까마귀가 백로를 비웃고 백로가 까마귀를 경멸하는 것도 모자라, 정상과 비정상이 뒤바뀐 채로, 백로로 변장한 까마귀가 까마귀로 되어버린 백로를 비웃고, 까마귀로 변해버린 백로가 백로로 되어버린 까마귀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극단적인 이분적사고와 함께 흑백의 논리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폐단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냥하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고로 발달한 보도매체나 인터넷을 매개로 하여 어느 한사람의 약점이 들어나면, 마치 동족을 향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견공들의 행태처럼 무언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겉과 속이 모두 검다는 논리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던 누군가 초죽음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던지거나 쇠고랑을 차게 될 때까지 짐승처럼 몰아대는 일을 서슴치 않는 것입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프랑스 군대를 겁쟁이에서 용감한 투사로 만들었던 잔다르크를 한때는 여신으로 치켜세워 떠받들다가, 콩피에뉴 전투에서 영국군에 붙잡히자 아무도 구하려하지 않고 방치하여 영국의 종교재판은 악령이 들었다는 논리를 내세워 화형에 처하게 됩니다.

내성적이고 따뜻한 마음으로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하여주고 최소한의 자유를 허락하였던 루이 16세를 폭군으로 몰아 궁색한 현장을 피하는 사람을 끝까지 붙잡아 단두대로 끌어올려 처형을 하였던 사람들의 흑백논리는 참으로 소름이 끼치는 것입니다.

자유, 평등, 정의를 모토로 내세워 신체의 자유와 생명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하여 일으킨 혁명을 주창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여론에 의한 마녀 사냥식 재판으로 상대방을 거침없이 여론의 단두대로 보내는 흑백논리는 이제 지양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사람다운 마음으로 욕심을 내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인간상에서 이제는 진정한 사람의 삶이 우러날 수 있는 새로운 토양이 필요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측해보지도 못하였던 갑작스런 사고로 태평양의 깊고 깊은 무인도에 표류를 하여 홀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동안 아귀처럼 다투었던 사람들도 한편으로는 그리워지기도 할 것입니다.

몇 년인가의 세월이 흘러간 뒤로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였던 인기척을 느낀다면 그동안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변하여 경계심이 발동할 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경쟁이나 투쟁의 대상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의 가닥을 정리하여 보면 이 세상에 필요한 필수품 중 어느 것 하나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사람은 드물 것이며, 막상 하나라도 직접 만들어 사용해 보려고 시도를 하다보면 절망적인 순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업무에 충실하게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들이 모여, 나의 간단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먹어야 하는 밥이나 빵 또는 물 등은 직접 생산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중에 한 톨이라도 생산해 보려면 1년이라는 세월과 함께 수도 없는 손길이 미쳐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어려운 과정을 묵묵히 수행한 농부가 아니었거나 매일 같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이나 택시뿐만 아니라 차량이나 도로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일일이 걸어 다녀야 하였을 것입니다.

사회의 각계각층의 다양한 업무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와 경쟁하여 다투는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생의 동반자라는 생각을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잘못이 있고 그로 인하여 약간의 피해를 보았다 할지라도 나의 삶의 방향에 커다란 영향이 없었다면 따뜻하게 이해하여 주고 무언가 깊은 속사정이 있었는지를 들어줄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대방을 향하는 질책을 표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허점도 돌아보는 여유가 있을 때, 사람과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가슴을 맞대고 살아가는 따뜻한 정이 솟아나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는 여유로 부터 나의 잘못을 용서 받을 수 있는 자투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검거나 희거나 극적인 대비의 성향이나 색깔만이 아닌, 오만가지의 상념과 채색이 어울려 그야말로 하나의 질서로 뭉쳐 지고한 아름다움으로 발현된 무량한 허공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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