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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삼조선 시대
  • 기사등록 2011-09-01 17: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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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갑신 원년(기원전 1237년)에 태자 아흘이 23세 단군에 즉위하였다.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령하여 낙랑골(옛 고죽군, 후 북평군)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남이, 후에 연나라)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의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기원전 1250년경(22세 단군 색블루 신미36년)에 변방의 장수 신독이 선제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갑신원년 7월에 신독을 주살하고 돌아와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을유 2년(기원전 1236년)에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오지로 들어가 희대의 땅을 평정하여 엄 땅에 포고씨, 서 땅에 영고씨, 희 땅에 방고씨를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하였다.

경자 원년(기원전 1161년)에 태자 연나가 24세 단군으로, 신해 원년 (기원전 1150년)에 태자 솔나가 25세 단군으로, 기묘 원년(기원전 1062년에 태자 추로가 26세 단군에 올랐는데,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 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

갑신 원년(기원전 997년)에 태자 두밀이 27세 단군에 올랐는데 천해(바이칼호)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에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 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신묘 8년(기원전 990년)에 큰 가뭄 뒤에 큰비가 쏟아져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식량을 널리 나누어 주었다.

경술 원년(기원전 971년)에 해모가 28세 단군에, 무인 원년(기원전 943년)에 마휴가 29세 단군에 올랐는데 그 해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치고, 을유 8년 여름에 지진이 있었으며, 이듬해 병술 9년에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멀리 물러갔다.

유자 원년(기원전 909년)에 태자 내휴가 35세 단군에 올랐는데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골에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 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주나라 사람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기원전 905년)에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정해 원년(기원전 874년)에 태자 등올이 31세 단군에 즉위 하였는데, 임인 16년에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임자 원년(기원전 849년)에 아들 추밀이 32세 단군에 오르고, 갑인 3년에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에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고,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으며, 병인 15년에 농사가 흉작 이었다.

임오 원년(기원전 819년)에 태자 감물이 33세 단군에 올랐는데, 계미 2년에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에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병오 원년(기원전 795년)에 태자 오루문이 34세 단군에 오르고 그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를 지어 불렀다.

“하늘엔 아침 해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 하라”

을묘 10년(기원전 786년)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기사 원년(기원전 772년)에 태자 사벌이 35세 단군에 즉위하였는데, 갑술 6년에 메뚜기와 홍수의 피해가 있었으며, 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오고, 임진 24년(기원전 748년) 큰비가 내려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기원전 723년)에 장군 언파불합(일본 신무천황의 부친)을 보내 바다의 웅습(일본서기의 구마지역( 큐우슈 지방의 휴가, 사쯔마, 오오스미, 히고 등지에서 살던 민족))을 평정 하였다.
정축 원년(기원전 704년)에 태자 매륵이 36세 단군에 올랐다.

갑진 28년에 지진과 해일이 있었으며, 무신 32년에 서촌에 있는 한 백성의 집에서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고, 신해 35년에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 무늬가 있었다.

갑인 38년(기원전 667년)에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일본열도)가 모두 평정 되었다.

무진 52년(기원전 653년)에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번조선, 기자의 후손)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는데,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제나라 사람들이 고죽에 쳐들어 온 것을 우리의 복병에 결려서 싸워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기원전 646년에 태자 마물이 37세 단군에, 같은 590년에 태자 다물이 38세 단군에, 같은 545년에 태자 두흘이 39세 단군에, 같은 509년에 태자 달음이 40세 단군에, 같은 491년에 태자 음차가 41세 단군에, 같은 471년에 태자 을우지가 42세 단군에, 같은 461년에 태자 물리가 43세 단군에 차례로 올랐다.

을묘 36년(기원전 426년)에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지칭하며 무리 수만 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 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민정의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단경을 점령하니 구지(아홉지역)의 군사들과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 하였다.

병진 원년(기원전 425년) 3월에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적병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구물이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구물은 여러 징수들의 추앙을 받아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이때부터 삼 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한사람에 맡겨 두지 않았으며,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여 평양(중국의 요령성에 있는 해성)이라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

정사 2년에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는데, 즉위한 3월16일에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에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째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에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려야 하는데, 무리를 거느리고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 하였다.

임신 17년(기원전 409년)에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 23년에는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을유 원년(기원전 396년)에 태자 여루가 45세 단군에 올라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았다.

신축 17년(기원전 380년)에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 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 32년(기원전 365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육박해 왔다.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언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파견하여 구원하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공격하여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잃어버린 성을 모조리 되찾았다.

정사 33년(기원전 364년)에 연나라가 싸움에 지고서는 연운도에 주둔하여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이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 47년(기원전 350년)에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 명을 주어 합세하여 연나라 상곡을 공격하고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 54년(기원전 343년)에 상곡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기묘 55년(기원전 342년) 여름에 크게 가물었는데, 죄 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경진 원년(기원전 341년)에 태자 보을이 46세 단군에 올랐는데, 그해 12월 번조선 왕 해인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가 다투어 일어났다.

무술 19년(기원전 323년) 정월에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정사 38년(기원전 304년)에 도성에 큰불이 나서 모두 타버리니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 하셨다.

계해 44년 (기원전 298년)에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을축 46년에 한 개가 수유(번조선, 기자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쳐부수었다.

단제께서 도읍지로 돌아오셔서 대사령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단제는 후사도 없이 붕어 하셨다.

병인 원년(기원전 295년)에 나라에 공을 세우고 무리의 사랑을 받아 추대를 받은 고열가가 47세 단군에 올랐다.

기묘 14년(기원전 282년)에 단군 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제를 지내도록 하고 단제는 1년에 한 번씩 제를 올렸다.

기유 44년(기원전 252년)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렸다.

계축 48년 시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이해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며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 57년(기원전 239년) 4월 8일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몽고의 할힌골 강 유역에 세운 나라) 사람이었다.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였는데 고구려 천년의 역사는 해모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계해 58년(기원전 23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이 되지 않았고 여러 징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피폐하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쇠퇴 하였다.

3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날 저녁 오가들을 불러 어질고 좋은 임금을 추대하도록 하고, 옥문을 열어 모든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보내도록 하고 이튿날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후 오가가 협력하여 6년간 나라를 함께 다스리다 진 조선은 진시황 정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암의 단군세기, 이맥의 삼한 관경본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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