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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삼한(三韓)시대(3)
  • 기사등록 2011-08-24 13: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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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14세 단군 고불께서 을유 6년(기원전 1716년)에 큰 가뭄이 들자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라고 기원하니 큰비가 수 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신유 42년(기원전 1680년) 9월에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 봉황(좌측의 수컷이 봉이고, 우측에 암컷이 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기원전 1666년)에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인 이었다.(중국대륙의 동쪽, 만주, 몽고, 한반도를 포함하는 인구분포로 추정)

경진 원년(기원전 1661년)에 대음이 14세 단군에 올랐는데,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이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이듬해에 홍수가 크게 일어나 흉년이 들었는데 단제께서 곡식을 창해사수(북해 부근)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같은 해 10월에 양운국,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기원전 1652년)에 서쪽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과 고유(원유)를 채취하도록 하였으며, 7월에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오니 염수근처에 살도록 하였다.

정미 28년(기원전 1634년)에 단제께서 태백산에 올라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공적이 새겨진 비석을 세웠다.

기미 40년(기원전 1622년)에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았다.

신미 원년(기원전 1610년) 우가의 위나가 추대를 받아 16세 단군에 올랐다.

무술 28년(기원전 1583년)에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으니 한인, 한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백성과 더불어 크게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우며, 경을 외우고 마당 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신에게 올리는 애한의 노래를 불렀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 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기사 원년(기원전 1552년)에 태자인 여을이 17세 단군에 올랐다.

갑신 52년(기원전 1501년)에 단제께서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 근처에 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리며 말하기를 “오래 선인의 나라에 백성으로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이 없고,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를 구경하지 못하였고, 믿음으로 경계를 관할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격지 않았거니”라고 하자,

단제께서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람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고 답하였다.

재위 88년에 달하였지만, 백성들이 누구의 덕으로 잘사는지 모를 정도로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정축 원년(기원전 1484년)에 태자 동엄이 18세 단군에 올랐다.

병신 20년(기원전 1463년)에 지백특(티벳) 사람이 특산물을 바쳤다.

병인 원년(기원전 1435년)에 태자 구모소가 19세 단군에 즉위 하였다.

기축 24년(기원전 1412년)에 남상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왔다.

기미 54년(기원전 1382년)에 지리숙이라는 사람이 별이 일주하는 궤도를 관측하여 만든 책력과, 팔괘가 중첩하여 이루는 변화를 풀이한 책을 지었다.

신유 원년(기원전 1380년)에 우가인 고흘이 추대를 받아 20세 단군에 올랐다.

신유 11년 가을에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에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기원전 1341년)에 공공(共工)의 벼슬에 있던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최초 관경지도)
갑진 원년(기원전 1338년)에 태자 소태가 21세 단군에 올랐는데, 은나라 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단군 소태 5년에 우사의 소정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경인 47년(기원전 1291년)에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은나라 때 갑골 문자의 기록으로 입증된 나라)을 쳐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색도(북만주 일대) 영지(하북성 천안현 서쪽의 나라)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조선의 군사들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기원전 1289년)에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단제의 명령 없이)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성 하였다.

여러 차례 단제에게 사람을 보내 우현왕(몽고, 흉노등 가한의 좌우에 제왕을 모시는 분봉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음에도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단제께서 우현왕에 봉해주지 않자 고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모반을 하여 대항 하면서 거듭하여 청하니 마침내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마한이 군대를 일으켜 토벌코져 하여 홍석령의 경계 지점에 이르렀을때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고 우현왕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었다.

고등이 항상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나 억지로 우현왕에 임명받자, 은나라 왕 무정이 군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러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하여 돌아 왔다.

서여는 은나라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번한인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 왔다.

을미 52년(기원전 1286년)에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손자인 색블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둘러보시다가 남쪽의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불러 모아 하늘에 제를 지내고 오가를 불러, 늙어서 스스로 제위를 지키기가 어렵다 하시며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시고, 서우여를 봉하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라 부르게 하였다.

마한이 불가함을 주장하고 우현왕 색블루도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중지케 하였으나 듣지를 않았다.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 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스스로 천왕으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 수 없어 옥책과 국보를 전하고 서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고는 스스로 제위에서 은퇴하였는데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밭 갈기에 힘쓰며 스스로 살아갔다.

단군 색블루는 할아버지가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을 장악하여 백악산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려 하지 않았는데, 여원홍과 개천령등이 명령을 받아 설득을 하자 이윽고 모든 욕살들이 결국에는 승복하게 되었다.

마한인 아라사는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색블루에 대항하여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천왕에서 폐위된 서우여는 몰래 좌원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22세 단군 색블루는 스스로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서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이에 따르므로 번한으로 삼으셨다.

병신 원년(기원전 1285년)에 녹산을 개축하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 왕을 제사 지냈다.

11월 구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은나라와 싸워 그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 부셨다.

이듬해 정유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희대의 땅으로 옮겨 가축을 기르게 하고, 농사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였다.

진 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리고 땅은 옛날 진한대로 하니 삼한이 모두 하나 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홍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하게 하시고 서우여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것이 역사에서 진국으로 단군 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

기해 4년(기원전 1282년)에 진 조선은 천왕의 칙서를 전하여 “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예의와 누에치기, 베짜기, 활쏘기, 글을 가르쳤다.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을 만들었으니,

1.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2.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3. 남의 것을 도둑질 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 그 집의 노 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4.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6.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은 자는 부역을 시키며,
7.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8. 사기 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공표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만은 면하여 준다.
(스스로 속죄하지 않았다 발각되면 모든 사실을 공표하여야 함으로 수치스러워 결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서로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 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신축 6년(기원전 1280년)에 신지인 육우가 아사달의 운이 다했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을묘 20년(기원전 1266년)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엄독골에 이르러 머무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천황의 교화는 멀리 항산 이남의 땅에 까지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암의 단군세기, 이맥의 삼한 관경본기 발췌, 서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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