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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죽비 소리
  • 기사등록 2011-07-27 16:54:49
  • 수정 2014-12-04 17: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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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고요한 산사에 선승들이 수련을 하는 선방에서 모두가 가부좌를 튼채 무아지경에 빠져 깊고도 깊은 선의 경지에 몰입해가는 과정에 간간히 들려오는 죽비소리는 연못에 번지는 파문처럼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던지고 있습니다.

육체가 느끼는 피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허공중에 선 육신의 중심이 기울어가는 것에 대한 체벌이자 경고의 메시지로 죽비를 들고 사방을 감시하던 수도승이 선승의 어깨를 두드리면 선방에 퍼지는 파열음과 함께 흔들리던 주체가 흠칫 놀라 소스라치고 정신의 혼 불을 다시 추스르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죽비를 사이에 두고 정중하게 상대방에 대한 신뢰의 의미를 담은 경건한 예를 나누고 다시 선의 경지를 찾아 몰입을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찰의 입구에 보면 엄청난 근육과 괴력을 뿜어내는 사천왕 상이 어마어마하게 큰 철퇴를 들고 왕방울 만큼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방문하는 불자들을 우선 압도하게 되는데, 이는 불국정토의 질서를 바로 잡고 언제든지 정도를 벗어나면 가차 없이 응징을 하겠다는 무언의 시위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고도로 승화된 정신세계의 도량이라 일컫는 사찰에서도 흐트러짐이 있으면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다방면에 걸친 방비책이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바세계의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바로 세워 정돈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질서에 역행하는 행태에 대하여 어떠한 제동 장치가 필요 하였는지 궁금해 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죄가 있으면 상응한 형벌을 가하기 위하여 시대를 달리하면서 그에 걸 맞는 사정기관을 갖추고 끊임없이 흩어지려 하는 반론들을 추슬러 모아 하나의 범주로 묶어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에는 임금의 권한을 대리하는 징표를 암행어사에게 부여하여 탐관오리와 부패한 관리를 척결하는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백성들은 가렴주구를 일삼고 온갖 불의를 저지른 사람에 대하여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다가온 암행어사의 출현에 통쾌하고 후련하여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관리들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보이지 않던 암행어사의 출현이 염두에서 떠나지 않아 조금이라도 올바른 정의를 세우려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련의 질서를 세우는 과정들은 누군가 저지른 죄업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응징과 체벌이 따르는 것 이었습니다.

요즈음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군인들의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것입니다.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나 피해를 입은 사람이나 모두가 대한민국의 건전한 아들로 가정이나 각 지역에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 이었을 것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한 무기로 같은 동료를 살상하는 서글픈 현실은 무언가 우리사회의 폐부 속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되는 것입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때로는 객관적 정당성을 내세워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가는 극단적인 사고들이 알고 보면 가해자 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매일 같이 일어나는 사건 사고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에 이어지는 다방면의 의사표시들이 모두가 수궁할 수 있는 상식의 한계를 잘 유지하면 좋은 일이지만, 무언가 어긋나는 의사표시에 반대 방향의 대응을 거듭하다 보면 감정이 개입되고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입장과 스스로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불합리를 안고 있습니다.

타인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 불륜이고 내가 잠간 외도를 하면 아름다운 로맨스인 것입니다.

“체벌금지”라는 화두에 묶인 우리 청소년들의 교육현장은 그야말로 제 갈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여 중심을 잃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배움의 전당인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라는 양방향의 인간상들이 모두가 본분을 잃고 흔들리고 있으니, 정작 스승의 권리 또한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에 대한 “체벌금지”라는 지도 이념을 시행한 지 꼬박 1년여의 세월이 흘러간 뒤, 태도가 불량한 학생을 훈계하는 스승에게 “체벌금지 아시죠” “동영상 찍어 신고 할 거예요” “교원평가 때 두고 봅시다”고 오히려 위협을 하고, 심지어는 담임교사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학생을 꾸짖는데도 “경찰서에 고발할 거예요”라는 주객이 전도된 발언을 하고, 건강에 해로운 흡연을 적발하면 “법대로 하세요” “밤길 조심 하세요”라고 막말을 하고, 무단 외출학생에 대하여 훈계를 하면 “전학갈테니 간섭 마세요”라고 방종에 가까운 발언을 스스럼없이 뱉어내는 것입니다.

학생이 스승에게 부모의 승낙도 필요 없고, 적당한 행정절차도 필요없이 마치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전학을 갈수 있는 것으로 발언을 하는 저변에는 가정에 있어서도 자녀의 위치가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고 있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 왔던 세대들이 자신의 자녀들에 만큼은 고생을 시키지 않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맹목적인 사랑이 결국에는 자녀들의 의식에 독버섯이 피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 자녀들이나, 지식을 쌓아가는 전당에 있는 청소년들이나, 상아탑의 학생들, 병역의 의무를 담당하는 군인들 모두에게는 하늘과 같은 귀한 인성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에게는 성숙한 사회인이나 종교인이나 교육자에 비하여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의식의 미완이 서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청소년의 의식과 행동에는 무언가 불합리한 결과의 도출이 따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방지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스승에게 최소한의 억지력으로서 죽비소리에 상응하는 체벌권이 어느 정도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어렵게 살아왔던 과거를 이야기 하면 엄청나게 싫어한다고 합니다.

부족함 없이 살아온 세대로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자신들에게 하면 맞지 않는 옷을 입으라고 권하는 것과 같은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우리 세상의 전통이 되고 설사 잘못된 것일지라도 현실을 올바로 살아가는 타산지석이 되는 것이고, 과거를 통하여 현재의 풍요함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식들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집착이 자녀들의 가슴에 한조각의 배려라도 들어갈 만한 여지를 남겨두지 못한 것입니다.

구시대에 비해서는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질 뿐만 아니라, 사이버의 세상에 들어가 자판만 때리면 꿈에도 이룰 수 없었던 현란한 동작과 파괴력을 만끽 할 수 있으니, 정작 우리 사는 세상의 참모습인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생각지도 못하는 압박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 민족의 장래를 꾸려 나갈 보물과도 같은 청소년들에게는 암담한 현실의 장벽이 너무도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대로 우리 시대의 교육이 표류하다 보면 급기야는 스스로의 정열을 쏟아 키운 자녀들의 의식이 병들어 비정상적인 관념으로 폭탄보다 무서운 흉기로 변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10대나, 어린여학생을 상대로 수십 명이 한꺼번에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무참하게 빼앗은 인면수심들은 모두 교육의 잘못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피해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차마 감당하기 힘든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정작 죄의 뿌리는 끝내 회개의 눈물 한 방울도 없이 담담한 현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느 사형수는 형 집행을 당하기 전에 어머니의 손을 한번 보자고 하여 이빨로 힘껏 깨물었다고 합니다.

완전한 의식이 정립되지 않았을 어린 시절에 자신의 잘못을 꾸짖고 혼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회환과 아쉬움이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내 자식 예쁜 것을 눈물로 참고, 남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등 잘못을 범하였을 때, 징벌을 아끼지 않았더라면 사랑하는 자식이 사형수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요사이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하는 세태에 의하여, 기성세대들도 퇴폐적인 문화와 편의적인 무질서에 익숙하여 청소년들의 모범이 되지 못하였던 부분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세대의 코앞에 놓여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무언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가 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 선생님은 동학교도의 내부적인 규칙을 제정하면서 “내수도문”에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어린아이 치는 것이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고 금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백성들과 부녀자와 어린아이에 대한 인권이 충분하게 보장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존중의 사상을 피력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렇지만 현세처럼 모든 사람들의 인권이 충분하게 보장이 되면서 청소년들에 대한 폭넓은 배려가 뒷받침 되고 있음에도, 이를 가르치는 부모나 스승의 “체벌권”을 묶어 통제 불능의 상태로 방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집니다.

자녀와 제자를 내치는 것이 아닌 선방의 수도승을 올바른 정신세계로 이끌어 가는 죽비소리와 같이, 가르치는 의미의 조용한 징벌은 우리시대에 있어 어느 정도 필요한 덕목이 아닌지 되새겨 보아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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