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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원혼
  • 기사등록 2011-06-24 16: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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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알게 된 장군은 민족의 성웅이셨고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바다를 연모한 나머지 나의 인생을 온통 바칠 각오를 하였는데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기 전 서점에서 처음으로 한글판으로 나온 일기를 마주한 순간 위기의 시대 지도자로서 인간적인 고뇌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아울러야 했던 번민들이 절절하게 가슴으로 녹아들어 요동치는 감정을 억제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릇 역사의 수레바퀴는 흥망과 성쇠를 반복하면서 문화적인 공전을 되풀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대륙은 바다를 부르고 바다는 대륙에 교두보를 원하고 그 사이에 반도가 있듯이 이들의 문화는 점진적으로 순환하는 동안 부득불 상호간에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일본열도를 하나의 체제로 정비한 풍신 수길은 임진(1592)년 4월 13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총칼을 앞세워 강토를 피로 물들이며 침략의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부산진에 상륙한 왜적들은 19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대왕은 급기야 사직을 이끌고 의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풍전등화의 시기에 혜성 같이 나타난 분이 바로 이 순신 장군인 것입니다.

임진년 5월 7일 옥포.합포 해전, 8일 적진포 해전, 29일 노량.사천 해전, 6월 2일 당포해전, 5일 당항포 해전, 7일 율포 해전, 8일 한산도. 견내량 해전, 10일 안골포 해전의 승리로 초기에 적의 예봉을 꺾어 육지에서 우리 군이 방비태세를 갖출 수 있는 기회와 명나라 군대가 지원할 시간과 퇴로가 차단된 심리적 억압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저지력을 보였던 것입니다.

왜란 초기시점부터 이후 5년간 장군은 적과의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는 연전연승의 기록을 세웠음에도, 공을 시기한 원 균의 모함과 왜장 소서행장의 간계에 놀아난 조정 대신들에 의하여 조정을 속여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쫓아 공격 하지 않은 나라를 등진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한 죄,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아 방자한 죄목으로 오히려 체포된 것입니다.

국가 존망의 시점에 군사적으로 열세인 조선 수군이 함부로 공격할 경우 엄청난 패배를 자초하여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 출전하지 않은 장군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정보에 눈이 어두워 전장에 계셔야 할 장군을 백의종군케 하였으니 국가 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있어 얼마나 허술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인 것입니다.

연로한 모친과 처자식과 두형이 남기고 간 조카들과 후손도 없이 세상을 등진 처갓집 제사까지 모시는 인간 이순신은 형극의 몸이면서도 병드신 어머님을 걱정하여 눈물짓고 안후를 묻다가 급기야는 정유년 4월 13일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날따라 비가 내리고 바람 부는 궂은 날씨였던 것입니다.

“뛰쳐나가 둥그러지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미어지는 슬픔이야 어찌 다 적으랴, 빈소를 차리고 맥이 다 빠진데다 남쪽길이 급박하니 어서 죽기를 바랄뿐이다.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 어디 또 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 하구나.” 처절한 절규이자 이 땅에 부도덕을 향한 포효였던 것입니다.

이후 금부도사와 가는 길은 노비의 신분이나 다름없이 민가 종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권율 장군의 휘하까지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경상좌우의 수군이 제대로 싸우거나 무찌른 기록도 없이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원 균의 전사와 함께 조선 수군이 궤멸되자, 육지의 수령들은 관가의 청사와 무기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버려두고 산으로 피신하기 바빴으니 나랏일이 얼마나 참담하였는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정유년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 되면서 장군은 쉬운 길을 놓아두고 위험을 무릅쓰며 초토화 된 고을을 돌아 내려가는 고난의 길을 택해 흩어진 민심과 군사들을 모으고 12척의 전선을 수습하여 천신만고 끝에 근무지에 부임하게 됩니다.

정유년(1597년) 음력 9월 16일 해남군 문내면 명량에서 피란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위장하여 후위에서 성원토록 하고 철 쇠를 협 수로에 깔아놓은 치밀함으로, 적선 133척을 향하여 혼자서 포탄과 화살을 풍우같이 쏘아대 진군하면서 “적이 비록 1000척 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 덤벼들지 못하고, 죽고자 하면 1명이 1000명을 막을 수 있다”고 독려하며, 다른 장수들이 겁을 먹고 물러선 후위에 거제 현령 안위와 중군의 이 응함을 초계기로 세워 불러들여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가면 살 듯 싶으냐,”며 일갈하시고 포환들을 있는 대로 쏘아대자 적선 31척이 분파 되면서 적들이 도망을 가니 이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강토를 유린한 왜적 한명도 남김없이 응징하고 전란의 종지부를 찍는 노량해전에서 갑옷도 버리고 방패도 없이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 하실 때까지, 7년간의 전투에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도합 23전 23승을 거두었으니 어느 세계해전 역사상 볼 수 없는 대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장군이 세운 혁혁한 전공만이 아니라 아내의 병세가 혹독하여 노모와 자식들 살아갈 일을 걱정하면서도 나랏일을 앞세워 군영을 떠나지 않는 단호함과, 전쟁에 임해서는 항상 선두에서 위험을 감수하여 솔선하고, 확인되지 않는 풍문에 동요되지 않는 초연함으로 포로나 백성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여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고, 도망간 수군을 잡아다 효수 하고, 영암의 의병장 유 장춘이 적을 토벌한 공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 50대를 때리는 장면은 추상같은 군령과 상벌을 엄격히 세우려는 고뇌의 흔적이 엿 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가족과 백성에 대한 끝없는 인간애와 임금을 향하여 수시로 올리는 망궐례를 빠뜨리지 않고, 교서에 제배를 하고 왕실의 제삿날과 조상의 제삿날 등에는 업무를 자중하는 등 그지없는 충과 효의 성심을 몸으로 실천 하였던 것입니다.

누명을 쓰고 두 번에 걸쳐 백의종군 하였음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업무를 수행하고, 매달 찾아오는 보름달만 보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조를 읊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발산하는 매력은 만인의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고, 우리 후손들의 간절한 소망으로 기원하여 어렵고 힘든 곳에 불을 밝혀 현세에 다시 환생하기를 고대하는 호국의 원혼이 되었던 것입니다.

장군께서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하였던지 지금도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 좋은 곳으로 가시지 못하고 최영 장군님과 함께 원혼이 되시어 구천을 떠도는 나그네로 계신다는 어느 심령사의 주장이 결코 헛되이 들리지 않는 것은 그만큼 장군의 나라를 걱정하는 신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자애심이 빛나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들만의 이익에 매달려 뒤집혀 보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종으로 울리는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 장군님의 혼 불이 생각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우리 자신들의 하염없이 지나가 버린 모습들을 되돌아 거울에 비추어 본다면, 장군님의 미소가 가슴에 먹물처럼 진하게 번지는 행운을 안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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