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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팡이
  • 기사등록 2011-02-14 14:19:39
  • 수정 2014-11-25 0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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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박영동] 제가 2002년도에 인천에서 근무하면서 주말이 오면 지도의 반쪽을 가르면서 토요일은 정신없이 내려왔다가 일요일 오후에는 그토록 간절하게 달려 내렸던 길을 또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을 반복하였던 약 11개월여 동안의 고달픈 여정이 있었습니다.

모든 샐러리맨들이 정해진 봉급 속에서 힘겹게 객지생활을 해가는 동안 마음이 바람 잔 호수처럼 평온할 수는 없었겠지만 날마다 보내는 시간이 지루하였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구 청사가 남동구 주안동 석 바위 부근으로 도시의 복잡한 곳에 자리한데다 건물이 노후하고 환경이 척박하여 시골 생활에 젖어 있던 저로서는 점심을 먹고 나면 서둘러 아파트단지 내의 등나무가 있던 공원에 가서 생각지도 못했던 매미 울음소리도 들어가면서 향수를 달래곤 하다 퇴근해서는 신청사 주변에 있던 문학산에 올라 밤이 야심
해 질 때까지 생각 없는 발걸음으로 지낸 뒤 고단한 다리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잠을 청하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어느 사이 창문 틈새로 따라 들어온 달빛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곤 하다 새벽별이 비추는 시간에야 잠이 드는 날이 허다 하였습니다.

신청사로 이사를 온 뒤로는 점심을 먹고 나면 노인복지회관의 정원이 마음에 들어 이따금 찾아가곤 하였는데 우연찮게 목격한 장면이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초등시절 수수께끼를 하면서 어려서는 4발로 다니고 어른이 되어서는 2발로 다니고 늙어서는 3발로 다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일행 다섯이 화단에 핀 꽃들과 나무를 감상하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서 적어도 팔십세는 넘어 보이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자세로 세 사람의 할머니가 걸어오시는데 모두 한결같이 손에 지팡이를 짚고 온전히 지탱하여 힘겹게 걸어오시는 모습을 목격한 것입니다.

힘겨운 할머님들의 행렬이 지나간 뒤 작은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무심코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저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고 하였더니 일행 중에 정색하며, “저런 날이 분명히 옵니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먼 훗날로 설마 저러한 날이 쉽게 오겠는가 싶었는데 숙명적으로 오게 된다는 사실에 순간적인 한기가 온몸을 스쳐 지나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지팡이를 짚고 가는 할머니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하였었는데 그로부터 9년여의 세월이 흘러간 뒤에는 지팡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번 명절에 날씨도 좋지 않고 어머님의 마음을 평안하게 모시지도 못한 자책감이 앞서 오금을 펴지 못한 자세로 우연히 어머님의 작은방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비닐봉지도 뜯지 않은 등산용 지팡이 세 개가 나란히 선채로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도 등산용 지팡이 몇 개를 가지고 다니다가 지금은 모두 잃어버리고 하나도 없는데 언뜻 저 중에 하나로 산에 다니면서 사용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순간 어머님의 다리가 불편하시다고는 했어도 평소에 지팡이를 사용하시지는 않았는데 어디서 세 개나 구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강타하는 회환에 어머님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따금 노인위안잔치에 등장하는 사랑의 지팡이가 생각이 난 것입니다.

문득 눈에 쌓여 있는 한적한 길 건너편에 앉아서 무작정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리다 마침 저를 불러 약 15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문 앞까지만 손을 잡아 달라던 할머니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어느 날 신호등에서 유모차를 옆에 세워두고 계단에 앉아 조용히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할머니의 애절한 눈빛이 생각나기도 하였습니다.

누군지는 모르는 고마우신 분이 자식도 챙겨주지 못한 사랑의 지팡이를 그것도 세 차례나 연거푸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눈을 감고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면서 뼈저린 반성과 함께 수만 가지 상념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아버님 생존해 계시는 동안 낫과 칼로 나무에 형편없이 새겨진 아버님 스스로의 문패를 보고 좋은 문패를 새겨서 가져다 드리겠다고 약속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끝내 지키지 못하고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가 버린 뒤 갑자기 지키지 못한 약속이 불현 듯 떠올랐을 때는 이미 지킬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에는 아버님 제사상에 한자로 새긴 문패를 새겨 드렸지만 이미 지나간 날들의 아쉬움 뿐 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는 평생 동안 제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대문에 달아본 적이 없습니다.

나뭇가지는 서 있으려 해도 바람이 와서 흔들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번 명절 어느 현자께서 내게 정중하게 던진 화두인 “사랑의 지팡이”가 정말로 저에게는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 왔습니다.

아마 1997년도 초여름 쯤 토요일로 기억을 하는데 다리가 불편하신 아버님을 위하여 사각으로 된 의료용 지팡이를 사드려야 한다면서 입버릇처럼 외던 조여사의 성화에 못 이겨 의료용구 가게를 수소문하여 상당히 비싼 지팡이 1개를 사들고 고향으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운명의 핸드폰이 울리면서 평소 절친하던 형님이 소주 1잔에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하여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거절을 못하는 터라 지근에 있던 주점의 달콤한 한잔 유혹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런데 고약한 운명 교향곡이 거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한집 두 집 건너면서 점점 더 그 도를 더해가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강화도에 가면 화문석이라는 특산품이 있는데 “TV문학관”의 어느 주인공은 온 식구가 합심하여 몇 날에 걸쳐 완성한 예술 작품을 등에 매고 장터로 향하였는데, 거래가 원만하게 성사되어 식구들로 부터 주문 받은 물건들을 사려고 이리저리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막내딸이 그토록 간절하게 꽃신을 사오라고 하였지만, 그동안의 고생을 잠간동안 씻어줄 한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시작한 것이 결국에는 동구 밖에서 발을 구르며 밤이 깊도록 기다리는 가족들 앞에 고주망태가 되어 빈손으로 나타납니다.

저 역시도 얼마나 많은 집을 거쳐 갔는지 마지막에는 빈손으로 귀가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행적을 따라 지팡이를 찾아보기도 하고 다시 구입을 하여 아버님께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도 수차례 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행하지 못하고 지팡이에 대한 쓰라린 추억은 무심한 세월 속에 슬그머니 묻혀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14년여의 세월이 흘러간 뒤 느닷없는 “사랑의 지팡이”가 나타나 나의 궁색한 잃어버린 날들의 보따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지나간 망령을 새삼스럽게 일깨운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버님께 지은 업보를 어떻게 하여 풀어야 할지 시간을 두고서 궁리해 보겠지만 다른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좋은 마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실천하려는 의지가 박약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 여사는 나름대로 영암에서 “사랑의 지팡이” 나누기 운동을 실천 하였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아프락사스”의 새는 알에서 하나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도약의 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코카사스 산맥에 살아가는 “코카사스”의 새는 밤에는 추운 나머지 이빨을 아득바득 갈면서 내일이면 반드시 집을 짓겠다고 다짐을 하였다가 따뜻한 햇볕이 찾아오는 낮에는 정작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한심한 “코카사스”의 새가 아닌지 스스로도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동안 인생의 모든 우여곡절과 만고풍상을 경험하신 우리 어머님은 3반에서 떡국 한 그릇을 시원하게 비우신 뒤 이제는 8학년 4반으로 옮기셨습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어머님의 일상 중에 복지관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시간들일까 생각해 봅니다.

어머님의 하루를 온전하게 책임지고 보살펴주시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자괴감이 앞서기도 합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이나 복지사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하루를 몇 개로 쪼개어 써도 부족할 만큼 바쁘게 사시던데, 세상에 어느 고마우신 분이 우리 어머님의 아프신 다리를 대신할 지팡이를 마련하여 주셨는지 그 은혜에 새삼 감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를 아프게 하여 낳은 친자식 새끼도 해주지 못한 우리 어머님 점심식사도 매일 복지관에서 따뜻한 국에 반찬으로 대접하신다니 그 고마운 정을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백골난망일 뿐입니다.

그동안 뿌려왔던 복지의 뒤안길이 부족한 자식들의 빈자리를 이토록 잘 지켜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량없는 그 은혜를 갚을 길이 막막합니다.

예전에는 대가족 제도로 한집에서 부모와 자식과 손자와 손녀들까지 모두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공동으로 생활하여, 노인들이나 장애인 또는 미숙아 등 생활에 부족함이 있었던 가족들이 크게 소외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벌어진 가족제도의 핵분열이 지나간 뒤로 직접 겪어보지 못하였던 사람은 그 쓰라림을 미처 짐작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상실감이 곳곳에 널려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연로하신 부모님께 잘해 드리지 못한 부분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언급하는 자체가 더한 불효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도 부족한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그동안 음지에서 묵묵히 복지사업에 종사하여 오신 분들의 은공으로 그나마 죄의 일부라도 가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각 자신에게 간절하게 필요한 것들이 무언가 있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부모 없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사랑의 공책, 연필, 지우개 등이 필요하고, 장애인에게는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사랑의 전동차나 각종기구, 편의 시설, 노숙자들에게는 사랑의 식사, 이불, 생활용품 등과, 연로하신 분들께는 “사랑의 지팡이”를 비롯한 온갖 물건들이 한없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사랑의 지팡이”에 하늘의 은총이 내려 앉아 사랑의 도깨비 방망이로 변하여 어둡고 부족한 곳에 온갖 풍요와 행복이 가득해지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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